섬진강 매실농원에서 생각난 게 황간이었다. 들러 가야지.
지루하고 잔인했던 그해 봄도 끝나고 천지는 온통 짙푸른 녹음이었다. 등줄기로 졸졸 땀이 흐르던 나날이었다.
뭔가 마음이 허기질 때면 생각나곤 하던 황간인데, 글쎄다. 그때도 허기졌을까. 생급스럽게 그 먼데까지 가서 그림으로만 본 매실나무 아래서 겉살을 태워가며 매실을 땄던 걸로 미루어 분명 그 해 봄은 허기지고 잔인했을 것이다.
손바닥만 한 읍내의 거리를 둘이서 활보했다. 그에겐 안방이나 다름없어 저 아지매가 웬 떠꺼머리 젊은놈이랑 돌아댕기누? 하마 이러쿵저러쿵 말 좀 나왔을법 하다.
그의 안내로 백화산 계곡에 들었다. 반야사 근처까지만 가도 찬기운이 쏴아 몰려나와 온몸이 서늘해졌다. 반야사는 지나치고 문수전을 올랐다. 물이 어찌 그리 파랄 수 있을까. 난간에서 내려다보는 계곡은 벽해(碧海)였다. 강도 파랗고 물도 파랗고 그 어디메서 바람은 잠시도 쉬지 않고 올라왔다. 옆 사람과 대화가 불편할 정도로 바람이 셌다.
그가 전각 안으로 들어가 절을 한다. 그동안 나는 난간에 서서 그 센 바람을 혼자 맞고 섰다. 벽해에 흰새가 날고 있었다. 푸른 바탕에 흰 점 두 개가 찍혔다. 이 세상이 아닌 듯한 신비로운 풍경이었다. 선계에 들어와 있는 듯한 환상을 보았다. 푸른 계곡 어디메쯤에서 청의를 입은 학인이 날아오를 것도 같은 환상의 체험.
그 계곡이 제법 유명해서 사계절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 명소라는 걸 그때 알았다. 잔인하고 지루한 봄을 그렇게 바람과 함께 한순간에 날려 보냈던 곳이었다.
얼마 후 그가 보낸 편지에 그 역시 내가 느끼고 체험했던 것을 똑같이 느꼈던 모양으로 그날의 감상이 실감나게 적혀 있다. 그 다음 편지에는 혼자서 다시 문수전을 올랐다는 것과 보살 앞에 엎드리는데 울컥 울음이 복받쳐 올라오더라는 이야기를 적어 보내왔다. 그의 글을 읽다가 알지 못할 서러움 같은 게 솟아올라 나 역시 짠해졌었다.
그 사람이야 생활이 고달프고 설움도 많음을 내 알지만, 빈둥거리며 혼자 잘난 맛에 사는 나 자신은 무엇이 그리 슬픔을 자아내게 했는지 모르겠다.
또 그 다음 편지에는 그날 사진을 찍어준 부부이야기가 있고 그게 인연이 돼서 편지도 주고받았다고 적었다. 사진이 몇 장 동봉돼 있었다.
이후로 가본다 가본다 하면서도 백화산 계곡엘 가보지 못하다가 로즈님을 동반하여 셋이서 반야사까지 갔었다. 그러나 문수전엔 오르지 못 했다. 그때가 이른 봄이라 거길 올라도 푸른 바다와 흰새는 없었을 터. 다음에 다시 찾을 것을 기약했지만 여직 가보질 못하고 있다. 그저 마음속의 이상향으로만 남을지도 모를 일이다.
푸른 바다, 그리고 흰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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