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과 언어가 다른데도 유럽이 통합될 수 있었던 건 국경선이 없었기 때문이다. 국경선이 있으되 월경이 자유로웠다. 우리는 이웃 나라를 가려면 배나 비행기를 타야 되고 거기에 따른 절차가 까다롭고 번거롭다. 유럽은 걸어서 이웃나라를 큰 제약 없이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었다.
바캉스시즌이면 각국의 젊은이들이 유명 휴양지로 몰려들었다. 그럴 때 그들은 카세트를 가지고 갔다. 자국의 가장 유행하는 노래들을 가지고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모이는 휴양지에서는 각국의 노래와 문화들이 자연스럽게 어울려 동화되고 흡수되었다. 이런 환경이 유럽을 어렵지 않게 통합하게 해 주었다.
예전에 기차간에서는 고성방가가 가능했다. 바캉스철에 기차는 젊은이들의 천국이었다. 강촌이니 대성리 청평 가평 등을 보유한 경춘선은 그 대표적인 열차였다. 여기저기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했고 카세트를 틀어 놓고 엉덩이를 실룩대고 고고나 디스코를 추기도 했다.
지금이야 생각도 못할 일이지만 당시엔 어른들도 시끄럽고 정신없어도 눈감아줬다. 아니 으레 그런 것이려니 인식되었다. 어린 학생이던 나는 기차 안의 그 열기가 좋았다. 얼른 대학생이 돼서 기타도 치고 계집애들과 방뎅이를 흔들며 부비부비도 하고 싶었다.
유럽의 젊은이들이 국경을 넘어 한데로 모였듯 우리의 기차도 각지의 젊은이들이 모여 문화를 공유하던 공간이었다. 아, 그 청춘과 넘치는 정열들은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어느 크리스마스 전야에 마석의 누이를 보러 가는 기차에서 듣던 ELO의 노래는 잊을 수가 없다. 나와 대각선의 건녀 편에 앉은 연인 한 쌍이 나지막이 틀어 놓은 카세트에서 감미롭게 흘러나오던 팝송들. 차창 밖은 하얀 눈세계였다. 감수성이 예민하던 그때 그 경험으로 나는 오래도록 팝의 세계에 빠져 살았었다.
그후 어찌된 일인지 기타를 치던 젊은이들은 자취를 감추고 빵빵하게 울리던 카세트도 슬그머니 사라졌다. 대신에 귀에 꽂고 다니는 마이마이가 대 유행이었다. 길거리에는 너도나도 죄다 이어폰을 꽂고 다녔다. 그래서 기차를 타도 넘치던 젊은 열기는 없었다.
세월의 무상일까. 같이 하는 축제에서 사회는 철저히 개인으로 돌아섰다. 정다운 이웃으로 대변되는 한국문화가 서구적으로 변하여 ‘나홀로문화’가 팽배해지게 되었던 것이다.
조용한 기차여행이 좋기는 하다.
하지만 왠지 뜨거운 청춘의 열기가 사무치게 그립기도 하다. 얼른 대학생이 되어서 그 특권을 맘껏 누려 보리라던 소망은,
막상 내가 그 나이가 되자 스르르 이데올로기가 변모해 버렸다. 나는 그게 못내 아쉽고 억울하다.
어쨌거나 나는 기차를 탄다. 플랫폼에 서면 터질듯 한 설렘과 아련한 향수 같은 그 모든 것들이 바람처럼 나를 휘감고 돈다.
고한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