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우리는 어느 때 어디서 어떤 모양으로 어떤 필요에 의해 이 땅, 지구별에 초대를 받았을까?
천지만물의 형상과 현상과 변화가 이치에 닿지 않는 것이 없으며 우주의 섭리 안에 있지 않는 것이 없을 진저!
너와 나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저 풀꽃의 나부낌 속에서 기적 같은 나를 찾을 수 있고, 송림 사이로 내리는 햇살, 지나는 바람 소리에서 생명이 움트고 이어지다가 사라지는 신비를 알 수 있음에도
눈으로만 보고 귀로만 들으려는 이 허깨비는 갇힌 곳에서 움찔거리고만 있다네.
산정의 정기를 품고 옹골진 샘으로 솟은 저 물은 어디서 와서 계곡 낮은 자리를 따라 흐르는가?
더러는 어딘가로 스미고 더러는 공중으로 피어오르지만 종내 저리도 편안하게 강과 섞이어 바다에 이르는데 회색빛에 젖어드는 도시의 귀퉁이에서 욕심에 눌려 무거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이 몰골을 그대에게 어찌 보이겠는가.
합당한 당위의 필연을 아지 못하는, 이 어리석은 초대된 자의 비애를 아는가?
산과 바다에서는 하루마다 성찬이 이루어지고 온갖 생명이 제 노래를 부르며 때와 곳에 어우러지는데 가당치 않은 사람의 욕심에 상실 당하는 도시는 순환의 길이 흩어지고 뒤틀어지고 막히고 체한 채 본래의 색깔을 잃고 비대증에 몸살을 앓고 있네.
지구별 거죽은 도처에서 상처를 입고 대지는 콘크리트 시멘트로 봉해져 숨쉬기조차 힘들어 하는데 인간의 편리와 어리석은 욕망의 분출은 어디까지 가려는가.
재앙은 스스로 일어나지 않으며 우주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한 필연으로 어떤 원인에 의하여 오래 동안 어긋났음을 일깨우고 뒤흔들어, 삼라만상이 제 자리에서 제 만큼씩 자리하여 서로 조화롭게 운기하여 이 모든 존재의 가치를 함께 누려가게 하려는 좀처럼 쓰지 않는 신의 도구 같은 장치일 것이야.
지구별 또는 우주의 순행에 해충으로 전락한 인간들은 뛰어난 생명력의 가능성을 올곧게 바로 쓰지 못하고, 재앙을 두려워하면서도 재앙을 더 빨리 불러 많은 생명들과 함께 몰락하려 기를 쓰는 꼴이다.
그대의 뜰에 연두 빛들이 초록으로 짙어졌을 것이야.
5월이 다 가기 전에 편지를 쓰려했네만 도무지 무엇도 내 뜻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이제는 무슨 뜻을 세운다는 것조차 맥없는 웃음으로 이어지곤 한다네.
어디를 가나 참 자유를 갖지 못하고 붙들린 안타까움을 다른 모양으로 발버둥 칠 바에는 여기 회색빛 음울하게 번져있는 도시 구석에서도 잘 못 길들여진 책임과 의무를 다하여야 하겠지.
결국 지금 내가 있는 ‘곳’과 지금 내가 지나는 ‘때’를 무조건 벗어나려 마음 졸이며
주어진 일마저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네.
늘 쫓기며 적당히 타협하고 굴복하고 체념하고 포기하던 불만어린 자세와는 다른
일종의 각성을 스스로 촉구하는 모양으로 보아 주시게.
내 주변에서도 많은 이들이 자연으로 돌아가 터를 잡고 순환의 이치에 순응하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지.
나는 그저 그들이 부럽고, 그들의 현실적 어려움보다는 그 정신의 추구가 가상히 보여 대리 만족을 위해서도 그들의 올바른 ‘자리매김’을 바란다네.
그리고 그들 곁에 언젠가 나도 가야지 하는 기대감을 붙들고 있는 것이지.
아우의 편지를 받고 그 바람직함을 긍정하기 위하여 책꽂이에서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을 오랜만에 끄집어내어 다시 읽었네.
사람의 일이란 시간의 흐름으로 모든 것이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닌 모양이야.
그 150여 년 전의 사람이 고민하고 안타까워하고 올곧게 추구하려 했던 것이 (톨스토이든 스코트 니어링이든 또 다른 많은 선지자들의 얘기마저도) 대중에게 크게 인식되지 못하고, 눈앞의 이익과 문명이라는 괴물의 노예가 되어가면서 지금도 똑같은 숙제를 안고 있는 것이지.
아니 더 심각해져서 이제는 많은 폐해가 눈앞에 일어날 것 같은 느낌마저 드는데.....
내 존재만으로 이 땅에 초대된 당위의 역할을 다할 수 있다는 것을 진작 몰랐네.
존재의 가치를 상승시키기 위하여 참 쓸 데 없는 여러 가지를 배우고 익히며 눈치를 보아왔지만 실상은 별로 나아진 것도 없고 그저 우리가 낮게 보는 벌레나 나무나 물고기나 별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지.
존재 가치의 인식이 너무도 잘 못 되어져버려 도대체 내가 어떤 방향으로 높은 사람이 되려고 했던지 어이가 없네.
높아져 갈수록 얼마나 더 불편해지고 외로워질 것인가.
나의 존재를 비롯한 모든 존재를 인식하고 그들의 끊임없는 변화를 인정하는 자세에서 나(인간)를 특별히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들과의 동화가 얼마나 더 쉬워질 것인가.
나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대 뜰 앞의 시냇물에 잠긴 조약돌 하나와 무엇이 얼마나 다른가?
그것은 움직임이 없고 나는 움직임이 있다? 그것은 생각이 없고 나는 생각이 있다?
이러한 착각들 속에서 분별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본래의 내가 아니듯 그 조약돌 또한 아주 오래 전에는 그 곳의 그 조약돌이 아니었을 것이고 나중에 몇 백 년만 지나도 그 곳의 그 조약돌이 아닐 것이야. 그런데 어찌 그 조약돌이 움직임이 없다고 할까.
어떠한 존재를 인간의 생각의 틀에 넣으려는 것에서부터 무언가 잘 못되어 온 것은 아닐까.
모든 것이 연관되어지지 않은 것이 없는데 너무 우리(인간) 위주의 가치 추구를 해 온 까닭으로 많은 존재들과 대치되고 부조화되게 된 것이 아닐까.
인간과 기계를 위하여 땅 위의 길이 너무 넓어진 모양과 같은 것이지.
그래서 인위적인 가공된 시간과 속도와 장소에 구애받지 않으려는 노력은 참 생명적이고 인간의 존재 가치를 자연의 흐름과 부합시키는 아름다운 행위가 되겠지.
그 속에서야 나는 아무 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이 되는 이치를 알 것이야.
그런 생활에 가깝게 다가서 실천하고 있는 아우이기에 경의를 표하는 바이네.
많은 것들이 만났다가 헤어지는데 존재끼리 생명끼리 맞닿아지는 인연의 경이와 신비는 어떤 말이나 글로도 다 할 수 없을 것이야.
아우에게 고마움을 표하며 지난번에 말한 낙서 조각을 덧붙이겠네.
아우의 기운이 조화롭게 그 곳의 부드러운 흐름과 함께하길 빌겠네.
*자기 존재의 인식 혹은, 흐린 날의 메마른 욕심*
단순하기
속도에 구애 받지 않기
일부러 인연 맺지 않기
흐름에 따르기
순환의 이치에 함께하기
우주의 기운에 순응하기
바라보기
받아들이기
그냥 느끼기
사랑하기
보듬기
웃기
잊기
버리기
비우기
끊기
자연의 시계(時界) 속에 들어가기
흔적 없이 섞이기
소멸하기
잊혀지기는 내 몫이 아닐까
비가 오면,
숲으로 드는 어귀 어디 쯤
나무 곁에 맨몸으로 서서
반성하기
우리는 어느 때 어디서 어떤 모양으로 어떤 필요에 의해 이 땅, 지구별에 초대를 받았을까?
천지만물의 형상과 현상과 변화가 이치에 닿지 않는 것이 없으며 우주의 섭리 안에 있지 않는 것이 없을 진저!
너와 나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저 풀꽃의 나부낌 속에서 기적 같은 나를 찾을 수 있고, 송림 사이로 내리는 햇살, 지나는 바람 소리에서 생명이 움트고 이어지다가 사라지는 신비를 알 수 있음에도
눈으로만 보고 귀로만 들으려는 이 허깨비는 갇힌 곳에서 움찔거리고만 있다네.
산정의 정기를 품고 옹골진 샘으로 솟은 저 물은 어디서 와서 계곡 낮은 자리를 따라 흐르는가?
더러는 어딘가로 스미고 더러는 공중으로 피어오르지만 종내 저리도 편안하게 강과 섞이어 바다에 이르는데 회색빛에 젖어드는 도시의 귀퉁이에서 욕심에 눌려 무거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이 몰골을 그대에게 어찌 보이겠는가.
합당한 당위의 필연을 아지 못하는, 이 어리석은 초대된 자의 비애를 아는가?
산과 바다에서는 하루마다 성찬이 이루어지고 온갖 생명이 제 노래를 부르며 때와 곳에 어우러지는데 가당치 않은 사람의 욕심에 상실 당하는 도시는 순환의 길이 흩어지고 뒤틀어지고 막히고 체한 채 본래의 색깔을 잃고 비대증에 몸살을 앓고 있네.
지구별 거죽은 도처에서 상처를 입고 대지는 콘크리트 시멘트로 봉해져 숨쉬기조차 힘들어 하는데 인간의 편리와 어리석은 욕망의 분출은 어디까지 가려는가.
재앙은 스스로 일어나지 않으며 우주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한 필연으로 어떤 원인에 의하여 오래 동안 어긋났음을 일깨우고 뒤흔들어, 삼라만상이 제 자리에서 제 만큼씩 자리하여 서로 조화롭게 운기하여 이 모든 존재의 가치를 함께 누려가게 하려는 좀처럼 쓰지 않는 신의 도구 같은 장치일 것이야.
지구별 또는 우주의 순행에 해충으로 전락한 인간들은 뛰어난 생명력의 가능성을 올곧게 바로 쓰지 못하고, 재앙을 두려워하면서도 재앙을 더 빨리 불러 많은 생명들과 함께 몰락하려 기를 쓰는 꼴이다.
그대의 뜰에 연두 빛들이 초록으로 짙어졌을 것이야.
5월이 다 가기 전에 편지를 쓰려했네만 도무지 무엇도 내 뜻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이제는 무슨 뜻을 세운다는 것조차 맥없는 웃음으로 이어지곤 한다네.
어디를 가나 참 자유를 갖지 못하고 붙들린 안타까움을 다른 모양으로 발버둥 칠 바에는 여기 회색빛 음울하게 번져있는 도시 구석에서도 잘 못 길들여진 책임과 의무를 다하여야 하겠지.
결국 지금 내가 있는 ‘곳’과 지금 내가 지나는 ‘때’를 무조건 벗어나려 마음 졸이며
주어진 일마저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네.
늘 쫓기며 적당히 타협하고 굴복하고 체념하고 포기하던 불만어린 자세와는 다른
일종의 각성을 스스로 촉구하는 모양으로 보아 주시게.
내 주변에서도 많은 이들이 자연으로 돌아가 터를 잡고 순환의 이치에 순응하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지.
나는 그저 그들이 부럽고, 그들의 현실적 어려움보다는 그 정신의 추구가 가상히 보여 대리 만족을 위해서도 그들의 올바른 ‘자리매김’을 바란다네.
그리고 그들 곁에 언젠가 나도 가야지 하는 기대감을 붙들고 있는 것이지.
아우의 편지를 받고 그 바람직함을 긍정하기 위하여 책꽂이에서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을 오랜만에 끄집어내어 다시 읽었네.
사람의 일이란 시간의 흐름으로 모든 것이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닌 모양이야.
그 150여 년 전의 사람이 고민하고 안타까워하고 올곧게 추구하려 했던 것이 (톨스토이든 스코트 니어링이든 또 다른 많은 선지자들의 얘기마저도) 대중에게 크게 인식되지 못하고, 눈앞의 이익과 문명이라는 괴물의 노예가 되어가면서 지금도 똑같은 숙제를 안고 있는 것이지.
아니 더 심각해져서 이제는 많은 폐해가 눈앞에 일어날 것 같은 느낌마저 드는데.....
내 존재만으로 이 땅에 초대된 당위의 역할을 다할 수 있다는 것을 진작 몰랐네.
존재의 가치를 상승시키기 위하여 참 쓸 데 없는 여러 가지를 배우고 익히며 눈치를 보아왔지만 실상은 별로 나아진 것도 없고 그저 우리가 낮게 보는 벌레나 나무나 물고기나 별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지.
존재 가치의 인식이 너무도 잘 못 되어져버려 도대체 내가 어떤 방향으로 높은 사람이 되려고 했던지 어이가 없네.
높아져 갈수록 얼마나 더 불편해지고 외로워질 것인가.
나의 존재를 비롯한 모든 존재를 인식하고 그들의 끊임없는 변화를 인정하는 자세에서 나(인간)를 특별히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들과의 동화가 얼마나 더 쉬워질 것인가.
나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대 뜰 앞의 시냇물에 잠긴 조약돌 하나와 무엇이 얼마나 다른가?
그것은 움직임이 없고 나는 움직임이 있다? 그것은 생각이 없고 나는 생각이 있다?
이러한 착각들 속에서 분별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본래의 내가 아니듯 그 조약돌 또한 아주 오래 전에는 그 곳의 그 조약돌이 아니었을 것이고 나중에 몇 백 년만 지나도 그 곳의 그 조약돌이 아닐 것이야. 그런데 어찌 그 조약돌이 움직임이 없다고 할까.
어떠한 존재를 인간의 생각의 틀에 넣으려는 것에서부터 무언가 잘 못되어 온 것은 아닐까.
모든 것이 연관되어지지 않은 것이 없는데 너무 우리(인간) 위주의 가치 추구를 해 온 까닭으로 많은 존재들과 대치되고 부조화되게 된 것이 아닐까.
인간과 기계를 위하여 땅 위의 길이 너무 넓어진 모양과 같은 것이지.
그래서 인위적인 가공된 시간과 속도와 장소에 구애받지 않으려는 노력은 참 생명적이고 인간의 존재 가치를 자연의 흐름과 부합시키는 아름다운 행위가 되겠지.
그 속에서야 나는 아무 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이 되는 이치를 알 것이야.
그런 생활에 가깝게 다가서 실천하고 있는 아우이기에 경의를 표하는 바이네.
많은 것들이 만났다가 헤어지는데 존재끼리 생명끼리 맞닿아지는 인연의 경이와 신비는 어떤 말이나 글로도 다 할 수 없을 것이야.
아우에게 고마움을 표하며 지난번에 말한 낙서 조각을 덧붙이겠네.
아우의 기운이 조화롭게 그 곳의 부드러운 흐름과 함께하길 빌겠네.
*자기 존재의 인식 혹은, 흐린 날의 메마른 욕심*
단순하기
속도에 구애 받지 않기
일부러 인연 맺지 않기
흐름에 따르기
순환의 이치에 함께하기
우주의 기운에 순응하기
바라보기
받아들이기
그냥 느끼기
사랑하기
보듬기
웃기
잊기
버리기
비우기
끊기
자연의 시계(時界) 속에 들어가기
흔적 없이 섞이기
소멸하기
잊혀지기는 내 몫이 아닐까
비가 오면,
숲으로 드는 어귀 어디 쯤
나무 곁에 맨몸으로 서서
반성하기
2004. 6. 1. 이양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