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햇빛 속으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설리숲 2011. 1. 28. 16:06

 

 옛 연인과의 추억이 있는 장소를 찾아보는 것. 설렘.

 과거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그런 장소만 찾아다니는 것도 대범하지 못하고 찌질한 꼬라서니지만 문득 생각나는 장소가 있어 가끔은 그리울 때가 있고 우연이든 일부러든 그곳을 찾아갈 경우가 있다. 그곳에서 옛 추억을 돌이켜보는 기분은 열애와는 또 다른 흥분을 주기도 한다. 무미건조한 일상에 다시 한번 연애에 빠지는 아름다운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노천리 느티나무라 하면 인근의 사람들이나 등산인들에게 꽤나 알려져 있다. 부근에 공작산 수타산을 찾는 사람들이 많은지라 이 느티나무가 길의 이정표 역할도 해 주는 것이다.

그해 이른 봄, 아직은 담 밑에 잔설이 남아 있고 봄의 징조라곤 부쩍 수량이 많아진 개천가에 버들개지가 하얗게 피고 능수버들 가지 끝에 연둣빛 새눈이 조금 보일만큼의 추운 봄이었다. 그날은 토요일. 언제부턴가 금요일 밤이 좋아로 시절이 변했지만 그때는 역시 좋은 건 토요일 밤이었다.

- 홍천에서 동면 가는 버스를 타고 노천리 느티나무에서 내려.

시트콤 콘셉트처럼 우리 그룹은 남자 셋 여자 셋이었고 나는 그들 중의 하나와 연애를 하고 있었다. 한달에 한번 만나 술이나 마시면서 우의를 다지던 아무 의미 없는 그저 그런 친목회 성향의 팀이었다. 그런대로 일년 이상은 끌었던 것 같다.

 그 봄 그 토요일에 색다른 장소에서의 가슴 뛰는 스케줄. 멤버 중의 한 아가씨가 그곳 노천이 고향이어서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는 그 시골집에서 보낼 아름다운 밤을 고대하고 있었다. 여자들은 먼저 도착해 있었고 남자들은 토요일 오후까지 일이 있어 저녁으로 모이기로 했다.

 

 그녀와 많이 소원해져 있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나 나중에 돌아보면 우리는 잘 어울리는 한 쌍은 아니었다. 하루를 만나도 불타는 사랑이 있는가 하면 십 년을 만나도 데면데면한 사랑. 그런 경우엔 가차 없이 이별하는 게 옳다. 사랑이 아닌 게 확실하다. 우리 사랑도 아마 후자의 것이 맞는 것 같다. 물론 지나가고 난 다음의 판단이지 그 당시 그녀는 내 아름다운 사랑이었다. 어쨌거나 데면데면한 연인의 일상이어도 늘 그렇지만은 않아서 만나 데이트를 하고 산책을 하고 밥을 먹으면서 남들이 누리는 연애의 기본은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때는 원인도 모르게 더더욱 서름해져 있었다.

 어둠에 완전히 묻힌 시골길을 달리는 버스에서 나는 착잡했다. 어쩐지 그녀 보기가 서름했고 한편으론 더 긍정적인 관계로 나가게 하는 기회가 될 것도 같았다. 그 좋은 징조가 하나 있었다. 홍천 터미널에서 시골집으로 전화했을 때 그녀가 받았다. 운전기사한테 느티나무에서 내려달라고 해. 그리고는, 당신 전화 목소리가 아주 생생하고 명쾌해서 기분이 좋네. 근래 없었던 정이 담뿍 담긴 목소리를 전해 주었던 것이다.

 노천리 느티나무가 워낙 유명해서 기대치가 높았다. 수령이 최소 300년이나 돼서 밑둥이 열 아름도 넘는 고목을 예상했지만 나무는 너무도 빈약하고 왜소했다. 그렇지만 느티나무 따위야 안중에도 없었다. 버스에서 내릴 때부터 나는 사뭇 마음이 설렜다. 자 토요일 저녁이다. 이제부터 내일 아침까지 광란의 축제를 벌인다.

 버스에서 내리자 어둠 속에 그 빈약한 느티나무가 있었고 랜턴을 들고 세 여자가 그 아래 기다리고 서 있었다. 아 여인들이여 그대들 발에 입 맞추고 싶어라. 그리고 밤을 밝혀 지새울 우리 청춘들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날 별이 반짝였던가. 밤새는 속삭였을까. 기억나는 건 싸늘하게 등골을 파고들던 이른 봄이 한기였다.

 시골집이 보통 그렇듯이 따끈한 온돌바닥. 특히나 딸내미 친구들이 온다고 낮에부터 불을 지폈을 아버지 덕에 우리는 밤이 이슥하도록 음주와 흥을 돋우며 금방 지나가 버릴 아름다운 청춘을 즐겼다.

 참으로 많이 취하고픈 밤이었다. 그녀는 내게 애정이 담뿍 담긴 눈으로 대했고 사뭇 내 옆에 앉아 시중을 들어 주었다. 제 숟가락을 치우고 내가 먹던 숟가락으로 안주를 먹었다. 연애라고는 했지만 첫 키스도 못한 우리였다. 그런 그녀가 거리끼지 않고 티나게 애정을 과시해 보였다.

 이야기도 지쳐 잠자리에 들었다. 죄다 한방에서 누워 잤다. 혼숙인 셈인데 여자들과 남자들의 경계는 나와  그녀가 지었다. 본의 아니게, 또는 고소원으로 처음 둘이 나란히 눕게 되었다. 그 기분이란.

 

  여기저기서 잠에 빠진 숨소리가 나고 나는 술에 약했으면서도 잠이 오질 않았다. 좋아하는 그녀가 옆에 누워 있다. 잠이 올 리가 없다. 그때 그녀가 옆구리를 찌른다. 그러고는 귀에다 대고 화장실 좀 데려다 달라 속삭였다. 옷을 주워 입어야 하지만 그대로 나갔다. 냉기가 덮친다. 별이 있었을까. 칠흑 같은 밤이었다. 예기하지 못한 일. 첫 키스. 연애의 절정이라는 그것. 다만 온몸을 휘감은 냉기에 몸이 떨린 기억 뿐. 그 봄밤의 키스의 기억은 없다. 다만 방으로 돌아오기 전에 돌아본, 저만치의 빈약한 느티나무. 아, 그날 달이 떠 있었던가. 밤새가 속삭였던가. 기억은 칠흑의 어둠인데 그 속에 찬 냉기를 입고 서 있던 느티나무가 보인다.

 

 그녀와의 연애는 그것이 정점이었다. 그 후로 어찌어찌 시나브로 우리의 애정은 엷어져 갔고 멀어져 갔고 잊혀 갔고 그리고 내 삶에서 완전히 없어졌다.

 

 사라진 사랑은 그러나 애잔하게도 어딘가에 남아 눈 맞은 느티나무는 여전히 그 길목에 서 있다.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뀌어 가는데도 나무는 잘리지 않고 서서 등산객들의 이정표가 되어 주고 있었다.

 벅찬 사랑의 기억은 잠시 머물다 사라지고 대신 많은 날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빈약하고 초라한 이 느티나무가 몹시 애처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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