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찾아가자니 영 귀찮고 꺼림칙스럽기도 했다. 그래도 뙤약볕에서 한 양동이나 되게 땀을 쏟아 버리고 얼굴은 새까맣게 탔다. 아마 팔과 다리의 관절도 수명이 훨 짧아졌을지도 모른다. 그걸 생각하면 반드시 품삯은 받긴 받아야 했다.
좀 돼먹지 못한 영감이다. 제가 언제부터 돈 좀 만져 봤다고 거들먹대는 품이 꼴불견이더니 제꺽제꺽 품삯을 안 주고는 나중에 한꺼번에 주겠다고 미루곤 했다. 그 누적된 금액이 사십칠만 원이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 농사라고 전에 그 말이 백번 맞는다고 할 수 있었으나 근래에 와서는 꼭 그런 것도 아니다. 그저 뭐든지 돈이면 만사형통이다. 사람 사서 트랙터 치고 이랑을 만들고, 배추 모종도 사다가 또 사람을 사서 이랑에다 심고 여름내내 약 치고 비료 뿌리는 것도 다 사람을 사서 한다. 그리고 때가 되면 장사꾼이 나타나게 되어 있고 흥정 붙여 밭떼기로 넘겨 버리면 한 해 농사 끝이다. 이쯤 되면 농사꾼이 아니다. 제 손가락 한 까딱 안하고 농사라니.
하긴 이즈음엔 농사가 아니라 투기다. 가만가만 배추금 시세를 보아 가며 밀고 당기기가 작금 농사의 실태다.
이 영감도 몇 년 이리 머리를 굴려 제법 상술을 부리더니 돈 좀 만지는 성 싶다. 더구나 올해 배추 값은 말해 무엇 하리.
그렇다고 제가 언제부터 무슨 대기업의 총수라도 된 양 어깨에 힘주고 다니는 걸 보면 올챙이 적은 아예 잊어버린 것 같다. 제 손으로 계분 날라 펴고, 마나님과 아들래미 동원시켜 배추 심고 여름내 비료 주고 약 주고는 장사꾼만 보이면 머리 살 살 조아리며 흥정하던 간데없는 시골 농사꾼이더니.
새파랗던 비탈밭들이 어느 결에 다 비고 바야흐로 가을이 다가오고 있었다. 사십칠 만원을 받으러 영감네 집엘 간다.
“어, 왜?”
현관문을 열고 부르니 난닝구 차림으로 누워 TV를 보고 있다고 멀뚱히 쳐다본다. 내가 용건을 말하니,
“그래? 얼마야?”
스치듯 얼굴 한번 보고 인사는 한 적 있으나 그게 전부인데 함부로 반말지꺼리하는 것도 영 마뜩찮다. 목침 베고 누운 자세 그대로다. 사람이 왔는데 마루 밑 똥개 쳐다보듯 한다. 사십칠 만원이라 하니 머리만 살짝 들고 그러나 여전히 멀뚱한 표정으로 안쪽에다 소리를 보낸다.
“어이!”
마나님이 빠끔히 얼굴을 내민다.
“돈을 받으러 왔다는데 잔돈 있어?”
천박한 졸부의 밑천을 보고 만다.
내년엔 배추 시세가 어떨까. 늦더위가 여전히 내 몸뚱이를 괴롭히고 있었다.
'서늘한 숲 > 햇빛 속으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0) | 2011.01.28 |
---|---|
그냥 내버려 둬 (0) | 2011.01.13 |
나무아미할렐루야 (0) | 2010.12.29 |
100원짜리 동전 하나 (0) | 2010.12.15 |
낙산사, 젊은날의 초상 (0) | 2010.12.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