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갈라?”
웬 반말...
“차 시간 좀 보려구요”
점암 선착장이다. 이곳서 페리호가 임자도와 증도를 드나든다. 배를 탈 생각은 물론 없고 되돌아나가는 버스시간을 보기 위해 매표소엘 들어가니 50대 중반쯤 돼 보이는 남자가 대뜸 호기심을 보이며 말을 걸어온다. 작은 시골이 다 그렇듯 간이터미널은 매표소와 구멍가게를 겸한다. 늘 새로운 사람에 대한 동경 내지는 호기심으로 이런 주인들은 내방객에게 필요치도 않은 말을 섞어 오기 일쑤다. 척하는 건 고맙지만 반말은 반갑지 않다.
대충 버스시간을 훑어보고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 간식과 음료를 산다.
“....??”
이번엔 여자가 말을 거는데 사투리를 도시 알아들을 수 없다.
“어디 왔소?”
“그냥......”
테이블에 앉아 음료를 마시는데 당최 나를 자유로이 놔두지 않을 작정을 했는지 또다시 말이 날아온다.
“여행 왔소?”
“예”
여자는 내 또래로 보인다. 이쁘지는 않다. 외모를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 가게를 첨에 들어갈 때부터 첫인상이 과히 좋아 보이지 않았었다. 이유 없이 밉상인, 어디 가서도 미움 받을 캐릭터가 있다. 아줌마가 그렇다. 그래서 그런가.
“여행 왔소? 할 일읍시?”
“예?”
할 일없이...... 은근히 부아가 나지만 그저 모른척하고 만다.
“젊은 사람이 일은 안하고 여행 다니오?”
음료를 마시고 내 행로를 가기 위해 가게를 나서는데 여자가 또 빈정대며 건드린다.
- 아니 이 여자가 무신 말을 저리 싸가지읎이 헌다냐
“모처럼 하루 놀러 왔는데......”
불의에 맞은 상황에 당황하여 얼버무렸는데,
“그래도 그렇제. 젊어서 한 푼이라도 벌어야 늙어서 신간이 편하제”
오늘 운수가 사나워 심사가 뒤틀려 있었나. 마치 심사를 풀어줄 좋은 먹잇감을 찾은 듯이 아니꼬워 하는 기색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는 해대는 것이다.
이 아줌마 참 오지랖이 넓다. 오는 손님마다 이리 간섭하고 참견하느냐 대거리하고 싶지만서도 차마 그러진 못하고,
“저도 일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쉬는 날이라 크게 맘먹고 왔어요”
딴엔 감정 누르고 조근조근 말한다 했지만 아무래도 말투에 시비조가 들어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오늘이 수요일인디 쉬는 날이라고라......”
여전히 비아냥대는 품이 영 정나미가 떨어진다. 자꾸만 거슬리고 부아가 치민다. 무슨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이 아줌씨가 작정하고 날 물고 늘어지는 거야. 아 시발 승질나네.
“오늘 수요일인데 쉬는 날이면 무슨 일 하는 사람이겠습니까. 조빠지게 노가다하는 놈인데요. 너무 힘들어 진짜로 빠질거 같아 하루 좀 쉽니다. 그럼 여행은 젊은 사람은 말고 꼬부라져 지팡이 짚은 노친네들만 댕기는가요?”
이렇게 퉁박을 주고 나오는데 좀 수굿한 기색이 등으로 전해져 온다. 첫인상이 밉상이더니 역시나 그랬다. 제 집에 온 손님을 그래 이렇게 대해도 되냔 말이지.
‘할 일없이’ 유유자적 놀러 다니는 것들이 당신들은 눈꼴시겠지만 내 집에 물건 사러 온 손님에게 할 짓은 아니요, 나는 걸신들린 사람처럼 돈 돈하며 놀 줄 모르는 사람들을 혐오하오.
예전부터 지도를 들여다보면서 이곳 신안군 지도를 한번 와 보고 싶었다. 반도와 섬이 다리로 연결되고 먼 바다 가운데까지 차가 들어갈 수 있는 지형이 왠지 호기심을 끌었다. 우리나라에서 차로 들어갈 수 있는 최서단이다. 지난 겨울 일 때문에 무안 해제까지는 갔어도 바로 지척인 지도읍 점암은 다음을 기약했었다.
우리나라 행정구역 중 가장 섬이 많은 군(郡)이다. 아니 많다기보다 아예 섬들로만 묶어 하나의 군을 만들었다. 그래서 이곳엔 군청이 없다. 이웃 목포에 신안군청이 있다. 내 고장 군청을 가려면 배와 버스를 이리저리 갈아타고 남의 동네 목포로 나가야 한다. 그런고로 이곳은 아직도 ‘촌구석’이다.
검은 갯벌 소담스런 바다, 바다 위로 점점이 이어진 섬들. 그 섬 어느 모퉁이에서 나타나는 연락선. 해변의 마을엔 곳곳에 억새가 하얗게 피었다. 이미 가을도 다 지나 추위도 몇 번 왔다갔지만 이곳의 기후는 여전히 온화하여 반팔 옷이 딱 제철인 듯 간편하여 좋다. 햇볕도 따스하고 바람도 부드럽고 시간만 된다면 며칠 이대로 걸어 다니고 싶은 정도로 좋은 여행지다.
주민들에겐 불편하겠지만 여행객들은 그곳의 문명이 발전하지 않고 영원히 정체해 있기를 원한다. 물론 이기적인 바람이다. 어쩌다 한번 지나가는 자들의 호사 사치를 위해 오래 터전 잡고 사는 사람들의 문명의 욕망을 백안시할 수는 없는 것. 단지 조화롭게 옛것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발전하는 어떤 뾰족한 방법이 있지 않을까.
돌아가려면 매표소 그 여자를 또 대면해야 한다. 꺼림칙하지만 어쩌누. 혹 또 엉겨붙을까 내심 불안해하며 표를 사는데 이 아줌마 영 딴판이다.
“사진 많이 찍었소?”
천연덕스레 웃고는 제가 먹던 오징어에서 다리를 하나 찢어준다. 그 모양은 또 어디 가서도 미움 받을 그 얼굴이 아니라 후덕하고 상냥한 시골여자의 그것이다 참내. 그건 그렇고 아줌씨나 나나 별 차이 없어 보이는데 나더러 젊은이니 뭐니 그러지 좀 마쇼. 공연히 늙은 티를 내지 말란 말이야. 내가 좀 동안이긴 하지만 쩝.
정류소에 스피커가 설치되어 있어서 내내 라디오 음악이 나온다. 버스 기다리기 지루하지 않겠다. 좋은 발상이다 이런 봉사정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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