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햇빛 속으로

삼겹살은 슬레이트에 구워먹는 게 최고다

설리숲 2010. 9. 7. 16:16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혀 건설한 새마을.

 그 초가지붕을 걷어내고 얹은 게 슬레이트였다. 한참 근대화의 가속을 붙이던 시기라 우둔한 촌것들은 사실 초가집에 사는 게 창피하기도 했었다. 어쩌다 도시에 나와 근사한 슬레이트 지붕들을 보면 선망 한편으로 기가 죽기도 했었지.

 그런데 위대한 영도자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서 그걸 가슴 아프게 여기시고는 전국의 촌락에 초가지붕을 다 걷어내라 하셨다.

 집채와 그 밖의 것들은 그대로 둔 채 슬레이트 지붕만 얹어 새마을을 건설하셨지. 마을 풍경이 얼마나 산뜻했던가. 기둥은 썩고 흙벽은 다 떨어져나가 그대로 주저앉을 것 같은 집도 멋들어지게 슬레이트지붕을 올려놓았다. 말하자면 286컴퓨터에 586소프트웨어를 까는 격이라 할까. 이 지붕은 여름엔 따뜻하고 겨울엔 시원했다. 그래도 그게 어디야 꼴보기 싫은 지푸라기 지붕이 없어졌는데. 과연 위대한 영도자였다.

 

 이 슬레이트 지붕이 이젠 사람들 골머리를 앓게 하고 있다. 인체에 치명적인 해를 입히는 물질로 만든 게 슬레이트다. 맨손으로 함부로 만지면 위험하다.

 “삼겹살은 슬레이트가 대빵이야”

 예전에 우리들 삼겹살을 구워먹을 때 가장 선호한 게 이 슬레이트였다. 화력 좋지 기름 잘 빠지지 얼마나들 많이 먹었던가. 지금 돌이켜보면 기가 막히는 일이다. 손만 대도 위험한 걸 그걸 고기에다 묻혀서 뱃속에다 차곡차곡 집어넣던 무지몽매한 백성들.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고 남은 시골마을엔 이 슬레이트 가옥들이 산재해 있다. 폐가들은 이제는 폐가에서 흉가가 됐고 그마저도 이젠 하나 둘 풀썩 넘어지고 있다.

 이 흉물스런 가옥들을 왜 방치하는지 최근에야 알았다. 이것들을 철거하고 싶어도 슬레이트가 위험물질이라 법적으로 아무나 손을 대지 못하게 돼 있다. 전문 업자들에게 맡겨야 하는데 그 비용이 또 엄청 비싸다고 한다. 평수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옛날집 한 동에 250만 원 정도라니까 나라도 안하겠다.

 

 한때는 찬란한 광휘를 받았던(아니, 받았던 걸로 호도된) 새마을운동의 잔재가 훗날 이렇게 되다니. 그 위대한 영도자는 슬레이트가 그렇게 나쁜 건 줄 알았을까 몰랐을까. 하긴 내가 살집이 아니니까.

 모든 게 이와 같다. 청계천을 덮어 차들이 많이 다니게 했지. 돈을 들여 복개공사를 하더니 또 돈을 들여 걷어냈다. 요즘 지방을 다니다보면 면사무소나 읍사무소들이 담장을 허물고 있는 걸 많이 본다. 돈을 들여 쌓을 땐 언제고 이젠 또 돈을 들여 부수고 있다. 주민들과의 열린 행정을 위해서라고. 모든 게 이와 같다. 앞날을 내다보지 못하는 근시안적인 사고들.

 

 

 허물어져 가는 산비탈의 옛집들을 보면 자꾸만 옛 위대한 영도자가 생각난다. 차라리 어서 허물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져서 그 위대한 영도자의 잔재가 완전히 소멸됐으면 좋겠구만 지금 그 2세를 자처하는 사람이 또다시 이 강토를 휘젓고 다니고 있으니 그 망령이 좋아서 웃고 있는 게 보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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