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아내들은 정숙하고 음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남자. 그리고 그는 아내에게 질투를 느껴 그녀를 살해하며 파국을 맞는다. 19세기 러시아 사회의 한 일상을 보여 주는 톨스토이의 명작 <크로이처 소나타>이다.
전문가 이상으로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톨스토이는 무슨 연유인지 베토벤의 동명 소나타를 폄하한다. 사람들의 불륜을 부추긴다는 이유를 댄다.
베토벤의 크로이처 소나타.
작품 47 바이올린 소나타 9번 A장조(Sonata For Piano And Violin No.9 in A Major op.47). 1803년 작품이다.
대부분의 음악들에 표제가 붙듯이 이 9번 소나타는 크로이처(Kreutzer)라는 제목으로 더 알려져 있다.
보통 협주곡은 주된 악기가 있다. 바이올린협주곡이라 하면 바이올린이 메인이 되고 피아노가 보조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베토벤 이전에는 어디까지나 피아노가 주주(主奏)였고 바이올린이 조주(助奏) 역할을 했다. 베토벤의 이 크로이처 소나타에서 처음으로 두 악기가 대등한 연주를 하게 됐고 이후로 위치가 역전되는 계기가 된다.
이 소나타는 원래는 바이올리니스트 브릿지타워에게 헌정하기 위한 곡으로 시연회에서 함께 공연했다. 하지만 그 공연이 끝난 뒤 술을 마시다가 둘은 몹시 다퉜고 베토벤은 격분하여 곡의 헌정을 취소했다, 대신 당대 최고 바이올리니스트인 루돌프 크로이처에게 헌정했고, <크로이처 소나타>라는 부제가 붙은 사연은 이와 같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크로이처는 단 한번도 이 곡을 연주하지 않았다.
아무리 들어도 이 음악에서 불륜 냄새는 나지 않는다. 이 음악은 모르고 있다가 스물한 살 때 톨스토이의 저 소설을 우연히 읽었다. 톨스토이를 비롯한 러시아 문학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이 소설 역시 분위기가 무겁고 침울하다. 나는 이 독특한 분위기의 러시아 소설들을 참 좋아한다. <크로이처 소나타>를 읽는 내내 베토벤의 동명 음악이 궁금했다. 도대체 어떤 소나타이기에 톨스토이가 그토록 광적인 모티프를 얻었을까.
레코드점을 돌아다녔으나 베토벤의 이 곡을 구할 수가 없었다. 아마 별로 유명하진 않은 곡이구나 나는 내심 심드렁해졌다.
그러다가 어느 날 선배의 집에 놀러갔다가 온갖 잡동사니가 너저분한 그의 창고에서 여러 장의 LP판을 발견했다. 그 중에 하나 바로 저 <크로이처 소나타>를 본 것이다.
그걸 집에 가져오긴 했지만 오디오가 없으니 그냥 오래도록 처박아 두었다. 결국 내가 이 소나타를 들은 건 10년이나 지난 후였다. 그것도 선배 창고에서 가져온 LP판이 아닌, 취직해서 번 돈으로 장만한 오디오로 말이다. LP가 아닌 콤팩트디스크였다.
뭐 내가 고전음악에 그리 조예가 있는 게 아니니 그저 맨송맨송 따분하기만 하고 전혀 음악으로서의 감흥을 느끼지는 못했다. 다만 확실한 건 톨스토이가 풍겨 주던 그 불륜의 냄새는 전혀 없다는 거였다.
글쎄 톨스토이도 다른 예술가와 마찬가지로 한 가지 정도는 괴팍한 성미를 가지고 있었나 보다.
“당신은 프레스토를 아십니까?”
주인공 포즈드니셰프가 기차간에서 마주앉은 사내에게 아내를 살해한 이야기를 하면서 처음 건넨 말이다.
“아신다구요? 아, 소나타는 정말 무서운 곡입니다. 특히 첫 부분이... 대저 음악은 무서운 것입니다. 도대체 그건 무엇이란 말입니까. 이해할 수가 없어요. 음악은 대체 무엇이냐구요”
톨스토이는 베토벤의 소나타에서 영감을 얻어 대담하게 리비도 문제를 다루면서 극적으로 이 음악을 묘사한다.
아내들의 정숙과 요조를 강요하는 포즈드니셰프는 그러나 저녁이면 러시아 상류층에 유행하던 음악회에서 예기치 않은 불행을 맞는다.
그의 말대로 아내는 세상에 다시없는 요조숙녀다. 오로지 남편과 집, 다섯 자녀 외에는 무신경하게 지냈고 또 거의 접촉할 기회도 없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방안의 장롱 같은 존재였다.
아내는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였다. 어느 날 자신의 집에서 예의 음악회를 열기로 한 포즈드니셰프는 트루하체프스키라는 바이올리니스트를 소개받아 아내와 함께 협주를 하게 한다.
그 음악회가 회를 거듭할수록 생명 없는 인형 같기만 했던 아내는 점점 더 화색이 돌기 시작하고 이를 보는 남편의 질투는 점점 짙어져간다. 그러나 자존심 때문에 음악회는 중단하지 못하고 결국 자신 주체할 수 없는 질투심에 아내를 살해함으로써 비로소 질투라는 고통을 끝맺는다.
평론가의 해설을 들어보면 아내의 코르셋 안에서 솟구치는 새빨간 피는 그녀가 연주하는 프레스토에서 이미 복선으로 깔려 있다고 하는데... 주인공이 기차간에서 낯선 남자에게 말하는 프레스토가 바로 그것이다.
베토벤의 소나타도, 톨스토이의 소나타도 명곡 명작으로 지금껏 사랑받고 있는 예술작품이다.
몇 년 전 TV단막극을 보다가 슬며시 미소를 지은 적이 있다.
내용이 유부녀가 다른 남자와 애틋한 만남을 갖는 그저그런 내용이었지만 어느 시점에 배경으로 흐르는 음악에 귀가 번쩍 뜨였다. 바로 베토벤의 저 <크로이처 소나타>였다. 상대 젊은 남자가 여인이 사는 아파트 공원 벤치에 앉아 기다리는 장면에서 바로 불륜의 냄새가 배어 있다고 느껴지는 저 바이올린 선율이 흐르는 것이었다. 오호! 연출자가 누군지 제법 센스가 있는 선곡이군. 이 정도면 불륜도 아름답게 그릴 수 있겠다.
불륜이 아름다울 수 있을까?
<매디슨카운티의 다리>에서는 그게 가능함을 보여 준다.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가슴을 달막이면서 그 불륜의 환상에 빠져들었던가. 실제로 그같은 사랑을 하고 싶다는 설문조사결과도 있고 보면.
어쨌든 본의 아니게 이 <크로이처 소나타>는 불륜의 음악으로 이미지가 굳어진 것 같다.
가을이다.
문밖엔 비가 내리고 멀리 어디선가 아름다운 사랑이 찾아올 것 같은 그런 저녁이다.
크로이처 소나타를 듣는다.
불륜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다 끌어안고 싶은,
그런 묘한 분위기의 저녁이다.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9번 작품번호 47 <크로이처> 중, 1악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