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고등학교 다닐 때 춘천에 집창촌이 세 군데 있었어.
그 중에 하나 우리 학교 근처에 있었다. 장미촌이라는 이름이었지. 춘천 역전에 있는 건 난초였구 육림고개에 또 하나가 있었는데 거기 이름은 몰라.
장미촌이 어트게 학교 근처에 있었는지 불가사의야. 큰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으니까. 우리 학교만이 아니라 여중 남고 여상이 죄다 모여 있었는데 말이야.
하긴 우리 학교에서 200미터 거리에 미군부대가 있었어. Camp Page
아마 그래서 그랬던 거야.
사람들은, 심지어는 선생님들도 그 여자들을 장미라고 불렀어.
가령 이런 식으로.
“느들 집으로 곧장 가야지 장미들이 꼬신다고 헤벌레 하덜 말어...” 따위.
내가 하려고 하는 얘기가 그건 아니구...
그 당시 암묵적으로 불리던 노래가 하나 있었다. 암묵적이란 건 금지곡이란 얘기야. 그게 가사가 이런 거야.
상처 입은 장미들이 모여 사는 거리
눈물에 젖은 장미들이 웃음을 파는 거리
사람들의 비웃음도 자장가 삼아
흩어진 머리 다듬고서 내일을 꿈꾼다오
그 언젠가 찾아 가리 해 돋는 집으로
꽃피는 마을 내 고향에 어머님 곁으로
햇빛 없는 뒷골목에 꽃은 시들어
외로운 사연 넘쳐흘러 설움도 많다오
그러나 빨간 낡은 헌차가 있으니
잃었던 꿈도 피우고 웃을 날 있으리
웃을 날 있으리
암묵적이니까 그게 언제부터 불리던 건지도 모르고 그냥 막연히 시정잡배나 어둔 뒷골목, 양아치들의 다리 밑 세계에서 나돌던 추악하고 더러운 노래 정도로만 알았다.
딱 들어맞지? 상처 입은 장미들이 모여 사는 거리...
바로 우리 학교 길 건너편의 장미촌을 노래 한 거 아니냔 말이지.
근데 후에 이 노래가 음성적인 추악한 노래가 아니라 김상국이 불렀고 버젓이 음반으로 나왔던 아주 정상적인 노래였었다는 걸 알았다. 한데암울한 당시의 시대상황에서 그런 가사의 노래가 인정을 받을 리 없지. 노래가 조금만 이상해 보여도, 아니 별것도 아닌 것도 꼬투리를 잡아 가차없이 칼을 맞던 시대였어. 하긴 저 노래는 20세기인 지금에도 양지로 나올 수는 없는 내용이긴 하지.
어쨌든 저 멜로디에 저 가사는 참으로 끈적끈적하고 구저분한 이미지로 오래 갔다.
대학교 때 팝송을 좋아해서 어느 때 리어카에서 파는 <추억의 팝송모음 테이프>를 하나 샀다. 주옥같은 팝의 명곡들이었지.
그런데 맨 마지막에 바로 저 노래 김상국의 <해뜨는 집>이 있는 거다.
아하 그때 처음 알았다. 해뜨는 집이 번안곡이고 원곡이 <House Of The Rising Sun>이었다는 것을. Animals의 원곡은 아무 건덕지도 없는데 번안곡 때문에 덩달아 금지곡이 됐다는 걸. 그땐 그런 세상이었으니까.
난 이 노래를 들으면 괜히 가슴이 울컥해져. 뉴올리언즈의 가난한 가족의 거친 생활을 그린 가사 때문도 그렇고, 아무런 죄도 없이 금지곡이라는 칼을 맞은 비운의 노래라는 것도 그렇고, 기껏 번안해서 부른 다는 게 상처 입은 장미들의 비참하고 설운 웃음을 내용으로 만들었다는 것도 그렇고... 아무리 봐도 장미들의 애환을 동정하는 게 아닌, 그저 장난거리나 비하하는 그런 노래로 밖에 안 들린다.
시종 울부짖듯 한 에릭 버든의 샤우팅창법도 그런 여러 가지 억울하고 비장한 심정으로 울분을 터뜨리는 듯 해서 나도 덩달아 가슴이 울컥해진단 말야.
이런 명곡이 오래도록 끈적끈적하고 구저분한 이미지로 남게 만든 그 모든 것들을 향한 울분이 나도 모르게 솟아올라 때로는 비죽이 눈물이 나기도 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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