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햇빛 속으로

지리산길 3박4일

설리숲 2008. 6. 24. 12:03

 

  첫째 날... 장마 시작되다


 지리산 등반이 아닌,  산 둘레를 걷는 트래킹코스가 생겼다는 신문기사를 스크랩해두고는 언제 갈까 고심하다가,

 하필 날을 잡아 떠난 그날이 장마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기상청은 며칠 전부터 화요일에 장맛비가 전국에 온다고 떠들어대더니, 과연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서는데 하늘이 희뿌옇다.

 참내, 그 많은 날을 놔두고 기껏 날을 잡은 게 그 모양이냐. 그래도 장마철이라고 날마다 비가 오는 건 아니니 날이 들었다 궂었다 할 테고, 운이 좋아 내 여행길에는 비가 좀 도와 줬으면 바랄뿐이지.

 

 

       



 둘째 날... 제 1구간 등구재길


 서울에서 하룻밤 자고 난 아침에 과연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전선이 북상하고 있다니까 아마 남쪽 지리산은 내가 도착할 쯤이면 비가 그치고 있겠지. 버스는 함양을 거쳐 인월에 나를 내려놓고 백무동으로 들어갔다. 내 바람은 무시하고 비는 여전히 내린다.

 인월에서 다시 군내버스로 산내면 매동마을로 갔다. 지리산길 트래킹이 시작되는 마을이다. 제 1구간의 시작이요 전구간의 출발점이다. 준비해간 비닐 우비를 뒤집어쓴다. 일회용이니까 오늘은 그런대로 흠뻑 젖는 걸 막아 주겠지만 내일도 비가 오면 낭패다.

 사전에 얻은 정보대로 마을이 하나씩 나타난다. 하황, 중황, 상황, 사진에서 본 다랑논도 지나고 사방댐도 지나간다. 온통 초록세상이다. 쏟아지는 비 때문에 정신이 없다. 카메라를 꺼낼 수 없어 그 아름다운 풍경들을 그냥 지나치고 만다. 그래도 반바지에 샌들을 신어서 다행이다. 긴바지를 입었다면 아랫도리가 척척해서 영 불편했을 거다. 운동화를 신었다면 또 얼마나 발이 불쾌할까. 서랍 속에 모셔두었던 선글라스를 처음으로 써 보겠다고 챙겨 왔던 터, 그러나 그걸 쓸 일이 없어 보인다. 비보다도 그걸 쓰지 못하는 게 영 맘이 안좋다.

 

                        


 


 길은 때론 깊은 숲속으로 들어갔다 마을 근처로 나오곤 한다. 이 깊은 산중에 사람들이 마을을 이뤄 살고 있다는 게 신기하다. 뿌연 빗속에서 할머니가 나하고 똑같은 우비를 입고 밭에 엎드려 있다.

 군데군데 물길을 만난다. 아직은 괜찮지만 이대로 비가 더 쏟아지면 물이 불어 갇힐 수도 있겠다 싶어 내심 불안하기도 하다. 물이 불면 돌아나올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목숨 내놓고 모험 하나 해보지.

 완만하지만 사뭇 오르막이다. 등구재로 오르는 길이다. 등구재는 남원과 함양, 곧 전라도와 경상도를 경계 짓는 고개로 예전엔 이 험한 길로 인월장을 보러 다녔다고 한다.

 비는 잠시 너누룩했다가는 다시 억수같이 퍼붓기를 반복한다. 등구재를 넘으면 사뭇 내리막길이다. 내리막길이 더 불편하다. 비에 젖은 흙길이 몹시 미끄러워 진행속도가 더디다. 어쨌든 오늘의 계획은 제 1구간 등구재길이고 일단 고개를 넘었으니 7할 이상은 온 셈이다. 속도가 더디더라도 목적지인 의탄 마을까지는 한 시간도 안 걸릴 것이다. 그제는 좀 여유가 생긴다. 다만 하산길에 물이 불어 고립되지 않기만을 바랐다. 숲속에 자욱이 안개가 서린다. 비가 그칠 전조였으면 좋겠다.

 

 곳곳에 안내팻말이 있어 길찾기가 쉽다

 

 

 다행히 고립되는 일은 없었다. 곳곳에 물이 넘쳐흐르긴 했으나 갇힐 만한 세력은 아니었다. 옷이 한껏 젖었다. 비옷은 입었으되 빗속에 오래 있으니 그 효과도 변변치가 않다. 아주 가풀막진 내리막길에 저 아래 영천강이 보인다. 그럼 의탄마을이다. 다왔다.

 

 의탄교에 서서 다리 아래를 본다. 비가 제법 오긴 왔나 보다. 급격히 불어난 시뻘건 물이 우당탕탕 쓸려 내려간다. 별 사고 없이 첫 구간을 마쳐 몹시 대견하다. 이대로 비가 더 쏟아진다면 내일 일정은 짜장 포기해야 할 것이다.

 의탄교를 건너면 의중마을이다. 가장 먼저 보이는 번듯한 간판의 민박집에 들어선다. 얼른 옷 벗어 말리고 샤워부터 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만 하루를 비가 내리더니 아침에 일어나니 맑고 투명해져 있었다

 

 


 셋째 날... 제 2구간 산사람길


 잠결로 들리는 소리는 밤새 비가 쏟아지는 소리였다. 참내 어연간히 해두지. 장마철 내내 비 쏟을 날이 많은데 좀 쉬었다 내리면 좀 좋나.

 그랬는데 아침에 눈을 뜨니 세상이 달라져 있다. 민박집 유리창에 환한 햇빛이다. 창을 여니 멀리 지리산 능선이 한결 말끔하게 다가선다. 비온 뒤라 모든 풍경이 깨끗하고 청량하다. 의탄교에 서서 내려다보는 강물은 안날 저녁보다 더 소쿠라져 흐른다. 어쨌든 자연의 세계는 참 신비하다. 어찌 그리 삽시간에 세상을 바꿀 수 있는지. 몸도 뽀송하고 기분이 몹시 들뜬다. 선글라스를 꺼내 쓴다. 그래 이거야.


 제 2구간은 길찾기가 만만치 않다. 전구간에 수시로 팻말이 안내를 잘해줘서 전날도 쉽게 걸어왔지만 2구간은 안내팻말이 있는데도 자꾸만 길을 잃기 일쑤다. 지리산길안내센터의 홈페이지에도 2구간엔 길찾기가 만만치 않으니 길동무를 신청하면 동행해 준다는 공지문이 있다. 아 그랬구나.

 몇 번을 헤맨 끝에 숲길로 들어선다. 비 온 다음의 숲은 참말 낙원이다. 청량한 바람, 청아한 새소리, 따가운 햇볕을 막아주는 나뭇잎 그리고 가까이 느껴지는 뭇 생명들.

 

                

 

 벽송사까지는 가파르지 않아 여유로운 트래킹에 최적이다. 내내 조붓한 숲길이다. 벽송사에 가기 전에 서암정사에 먼저 들른다. 법당이 바위굴 속에 있다. 요사만 번듯한 너른 마당에 있고 그 밖의 당우들은 죄다 바위굴 속이나 바위 벼랑에 얹혀 있는 특이한 도량이다.

 그리고 벽송사. 지리산 빨치산과 더불어 아픈 역사를 겪은 대가람이다. 규모는 그리 크다 할 순 없지만 벽송대사와 서산대사, 사명대사 등 걸출한 명승을 배출한 곳이다. 전란 때 불타 버린 이력으로 다시 지은 건물은 현란한 단청이 전혀 없다. 조촐한 것 같으면서도 일변 귀족적인 맛이 느껴져 나는 차라리 단청을 칠했으면 어떨까 한다.

 벽송사까지 오면 제 2구간의 절반을 온 셈이다. 지리산길은 벽송사 뒤편으로 이어진다. 저만치 앞서 여스님이 보인다. 이틀을 걸어온 산길에서 첨으로 만난 유일한 사람이다. 제2 구간은 옛날 빨치산들이 활동을 했던 길이다. 그 당시는 그들을 ‘산사람’이라 불렀으며 그래서 이름도 ‘산사람길’로 붙였다 한다. 여기서부터는 아주 험한 산길이다. 그제는 샌들이 불편하다. 숨이 찬다. 땀이 비 오듯 한다. 그런데.

 방향을 바꿔 송대마을로 내려가는 기점에서 길이 없어졌다. 친절하게도 여기서부터는 험한 산길이니 산행을 자제해서 되돌아가라는 현수막안내문이 붙어 있다. 이런 제기랄! 지리산길이 개통됐다고 홍보할 땐 언제고 사람이 다니도록 갖춰놓을 것이지.

 

 

 안내문을 무시하고 비척대고 돌진한다. 그래도 내가 산사람 아닌가 그까짓 거. 그렇지만 곧 다시 되돌아 나와야 했다. 짜장 험하기가 이를 데 없고 뭔 길이 있어야 움직이지. 더구나 그런 신발로는... 시간은 벌써 오후의 반나절이 지나 있었다. 무리해서 길을 찾아 내려간다 해도 날이 지면 조난당하기 십상이다. 기껏 뻘뻘 올라간 게 거리가 얼만데 되돌아 나오려니 허탈하고 맥이 빠진다. 이번 여행은 이만 마치기로 결정을 보고 벽송사로 내려왔다.


 칠선계곡이다. 지리산 수많은 골짜기 중에서 그 절경이 뱀사골과 더불어 가장 빼어나다는 계곡이다. 벽송사는 그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고 그 아래 추성마을이 보인다. 계곡물은 장맛비로 불어 쏴아 가슴시원하게 소쿠라져 흘러내린다.

 추성마을에서 군내버스로 함양으로 들어갔다. 마무리를  못 지은 게 아쉽지만 고달픈 중에도 참 멋진 여정이었음을 느낀다.

 

    


 

 


 넷째 날... 먼 여행


 하루 종일을 버스에서 보낸다. 함양에서 남부터미널까지, 남부에서 동서울까지 전철로 이동, 동서울에서 정선까지 다시 버스. 귀로하는 데 차에서만 9시간이다. 교통편이 좋지 않은 시골에 산다는 건 이럴 때 많이 손해를 본다는 느낌.

 아무려나 그래도,

 늘 떠나는 길이지만 그때마다 여행은 자꾸만 설레고 내가 살아 있는 의미와 기쁨을 주곤 한다.

 장마가 시작된 첫날만 그렇게 쏟아지더니 날은 내내 무덥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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