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초록의 茶園에서

녹색의 차

설리숲 2011. 2. 11. 00:48

 

 

 세 가지 색, 세 가지 음료.

 와인, 커피, 차.

 茶는 물론 녹차를 말한다. 전 세계인에게 사랑을 받는 3대 음료이자 과학적으로도 검증된 건강식으로도 각광받고 있는 것들이다. 와인은 물론 와인색이고 커피도 커피색인데 녹차는 분명 녹색이 아님에도 녹차라고 한다. 아마 원료인 찻잎이 녹색이라 그리 이름 붙였을 것이다. 우려낸 차는 특별히 색이 없다. 맑은 무채색이라 하기도 뭣하게 은근한 노란색을 띄기도 한다. 끽다생들은 푸른빛이 감도는 차를 아주 훌륭한 차라고 추켜세우기도 하는데 글쎄다 입맛은 다 제각각이니까.

 언젠가 녹차에 관한 기사를 읽으면서 ‘차 소믈리에’라는 명칭을 쓴 기자를 내심으로 몹시 경멸한 적이 있다. 그렇지만 기자는 억울하기도 하겠다. 커피는 바리스타, 와인은 소믈리에라는 전문가가 있지만 녹차를 다루고 관리하는 전문가에게는 적당한 명칭이 없다. 흔히 티 마스터(Tea Master)라 하기도 하지만 궁여지책으로 갖다 붙인 감이 있어 어쩐지 어색하다. 멋지고 그럴싸한 이름이 나와 널리 통용됐으면 한다.

 

 

 차를 우려내고 따르면서 좌중을 이끄는 사람을 팽주(烹主)라고 한다. 팽주라고 특별히 자격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좌중에서 가장 차를 잘 알고 즐기고 다기를 다루는 사람이 맡곤 한다. 주로 손님을 초대한 주인이, 사찰에서는 스님이 손수 신도들에게 이런 서비스를 한다. 찻물을 끓이는 것부터 시작해서 다관 숙우 찻잔을 다루며 마지막으로 다기를 잘 닦아 마무리까지 한다. 게다가 시종 대화를 이끌어가며 분위기를 만드는 것도 팽주의 중요한 역할이다. 그러니 자격이 있는 건 아니라도 아무나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또 한가지,

 예전 조선시대에 다모(茶母)가 있었다. 관에 속한 노비다. 식모 찬모 침모 유모 보모 등속의 母라는 글자를 붙인 걸로 봐도 사회적으로 아주 천대 받는 계층이다. 한때 TV 드라마로 방영된 다모로 인해 그 원래의 정체가 왜곡되어 있는 바, 칼을 차고 허공을 휙휙 나는 검객도 아니요, 드라마에서처럼 계급이 천양지차인 유생과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처지는 더욱 아니다. 또한 조선여형사라는 형언도 도저히 말이 안 된다. 말 그대로 차와 그것에 관련된 심부름이나 시중 등 허드렛일을 하는 여자일 뿐이다. 가끔 포도청에서 범죄수사에 쓰기 위해 이 다모를 잠시 고용했다는데 그것 가지고 조선여형사는 정말 어불성설이다. 대중매체가 과장과 왜곡이 지나쳐 진실이 호도되기도 하고 그때까지의 문화를 삽시간에 뒤집어 버리는 병폐가 심각하다. 다모를 보고 자란 사람들은 정말로 다모가 하지원처럼 멋있고 근사한 검객 내지는 여형사로 인식할지 모른다. 또 영화 <뽕>은 아주 잘 만든 수작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뇌리에는 에로영화 이상으로는 인식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나라 자연주의 소설의 최고봉인 나도향의 <뽕>도 덩달아 희화되고 말았다. 옥동자는 아주 어여쁘고 귀한 아들을 가장 칭송하여 이르던 말인데 이젠 옥동자는 못생긴 사람의 대명사로 전락되었잖은가.

 

 우리나라 차 시배지는 경상도 하동이다. 그 역사가 천 오백년이나 된다. 요즘 녹차 하면 보성의 여러 다원들을 떠올리곤 한다. 보기에도 시원한 드넓은 다원의 차나무들. 보성 일대의 다원들은 그래서 관광지로도 각광을 받고 있지만 좋은 차는 하동, 특히 화개 일대에서 생산된다. 보성의 다원들은 대규모로 생산하고 게다가 태평양 등 기업들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규모는 엄청나게 크지만 그 질에 있어서는 그렇다고는 못 한다. 화개의 차밭들은 대개 야생의 나무들이다. 가파른 산비탈에 조성되어 있어서 보성처럼 기계로 움직이는 생산을 아예 꿈도 못 꾼다. 그러므로 이곳은 수제차라는 것을 앞세워 그 품질에 중점을 둔다. 해마다 5월이면 아주 큰 규모의 차 축제를 열어 그래도 우리나라의 차는 화개가 제일이라는 것을 널리 홍보하고 있다.

 그 전통과 문화는 무시 못 하는 것이어서 악양 사람들의 일상에는 차 문화가 깊게 자리 잡혀 있다. 여보게 차 한잔 하고 가게. 흔히 남정네들이 만나면 술 한잔 하자는 게 보편적인 인사지만 악양 사람들은 차를 한잔 하자고 한다. 대부분의 농가는 다기 일습과 차를 구비하고 있다. 차를 마시려면 보통 삼십 분에서 한 시간 가량 걸린다. 커피처럼 물을 끓여 금방 홀짝 마시고 일어서는 게 아니다. 첫잔에서 백차까지 이어지면서 한담을 나누는 게 끽다다. 그러니 바쁜 농군들이 그렇게 앉아서 차를 마신다는 것이 참으로 교양 있고 멋스러워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나는 와인이나 커피를 좋아한다. 그것들은 명백한 색이 있고 색깔만큼이나 그 향과 맛도 즉각 느껴진다. 하지만 차는 색깔도 없고 역시 그 향과 맛도 밍밍하니 내 입에는 그닥 당기지 않는다. 하지만 그 은은함과 여백, 여유로움이 차의 매력이고 그것을 즐기는 사람 또한 심성이 그렇다. 스타벅스의 모토가  맛을 파는 게 아니라 그 분위기를 판다고. 나는 밋밋한 차보다는 자극적인 커피의 맛을 좋아하지만 그 은은한 향과 함께 사람들과 어울리며 나누는 정담과 분위기가 참 좋다.

 여전히 추운 계절이지만 저 남쪽 비탈에서는 이미 봄의 싱그러운 잎들을 피워 올리기 위한 찻잎들의 준비가 시작되고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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