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햇빛 속으로

김제 귀신사

설리숲 2024. 12. 20. 21:17

 

 

 

 

 

 

 

선득한 이름의 귀신사.

선입감은 그렇지만 귀신사는 지나치게 조촐했다.

섬뜩한 귀신이 아닌 귀신사(歸信寺).

 

지나치게 조촐하다고 말했지만 실은 20여 년도 더 전에 들렀을 때, 그땐 제법 음산한 느낌이었다.

분명 그날의 내 심정이 음울해서였을 것이다.

어디에고 마음 붙이지 못하고 쓸쓸했던 그 겨울이었다.

공동체마을을 나와 여기저기 쏘다니다 우연히 만나게 된 귀신사였다.

담장 밑에 눈이 두텁게 쌓여 있던 기억이다.

 

양귀자의 소설 <숨은 꽃>의 무대배경이 이 귀신사다.

긴 분량에서 반 정도는 드러내도 될 것 같은 지루한 소설이다.

그래도 소설 첫 문장에서 느닷없이 발견한 귀신사에 얼마나 반가웠던지.

별것 아닌 것 같은 그 조촐한 도량에서도 문학의 모티프를 얻는 작가들의 능력에 존경심을 느꼈었다.

 

 

 

 

 

워낙 조촐하고 적막한지라 숨소리도 함부로 내기 꺼려지는 경내 풍경이다.

새 한 마리도 없이 움직이는 건 마당에서 일하는 불목하니 처사님 하나뿐이다.

처사님이 나를 보자마자 인사를 한다. 엉겁결에 합장하고 마주 고개 숙인다.

눈이 녹은 경내는 칙칙하다. 게다가 먹구름이 오락가락 햇빛을 가려 처음 왔을 때의 음산한 느낌이 되살아났다.

아마도 그날처럼 내 심사가 환하지 못해서일 것이다.

 

 

 

대웅전인 대적광전 측문을 여는데 지나치게 소리가 크다.

사찰에 가서 법당 안에 들어가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다.

 

어둡다, 고요하고 텅 빈 공간이다.

잠시 우람한 비로자나불을 올려다본다. 고요한 세계다.

 

 

 

 

 

 

 

 

 

 

 

 

 

 

 

 

 

 

 

 

마당 담장 너머는 마을이다.

마을은 이미 깊은 겨울에 들어가 있었다.

 

 

대웅전 앞의 큰 배롱나무가 인상적이다.

백일홍 피는 여름이면 찍사들이 몰려올 정도로 귀신사의 명물이다.

 

 

 

 

 

 

 

 

 

 

 

 

 

가을과 겨울의 경계라는 게 명확하지 않지만

지금까지 내겐 가을과 겨울을 구분하는 나름의 기준이 있었다.

어느날 옷을 벗는데 찌르찌륵 정전기가 튀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겨울이라고 정의해 왔었다.

 

올해는 느닷없이 폭설이 내려 버려 그날로 겨울이 되었다.

정전기 없이 마음의 준비도 없이 하루 아침에 계절이 바뀌었다.

귀신사 경내에 준비 없이 눈을 맞은 꽃들이 처량하게 남았다.

 

 

대통령이라는 사람의 느닷없는 해괴한 짓이 평온한 나라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준비 없이 눈 맞은 꽃송이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귀신사는 마을에 내려와 있다. 마을 어느 골목에서도 절이 바라다보인다.

어쩌면 마음이 울적할 때 무시로 드나들며 비손하는, 마을의 성황당 같은 존재 같기도 하다.

 

 

 

 

 

하늘은 내내 검은 구름이 몰려다녔다.

사이사이 밝은 햇살도 내리쬐는 요상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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