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터미널에 내리니 포근하게 눈내려 쌓이고 사위는 뿌연 연무로 가득 찼다.
도림사로 가는 길은 벚나무가 늘어서 있다.
크리스마스날 아침이었다.
성탄일에 굳이 절을 찾아가는 게 못된 심보라 할 수는 없다. 종교가 없는 사람에게는 그냥 공휴일이다.
크리스마스 연휴에는 템플스테이 등으로 사찰 방문객 수가 여느 때보다 많다는 통계를 방송뉴스에서 보았다.
불교방송에서도 이날은 크리스마스캐롤을 틀곤 한다. 종교를 떠나 즐겁고 거룩한 날이다.
동악산 기슭에 도림사는 포근하게 눈을 맞고 있었다.
나 말고는 사람 그림자 하나 없다.
경내에 찻집.
문을 열고 들어서자 와락 훈기가 달려든다.
여기서도 내내 크리스마스캐럴이 흐른다.
대추차를 주문해 마신다. 산사에서 보는 설경이 고즈넉하고 평안해 보인다.
찻집 보살님(아가씨인지 아줌마인지 구분 못하게 젊은 여자지만 절 관계자이거나 보통의 여자들을 불가에서는 통상 보살님이라 부른다)은 난로에 기름을 넣다가 쏟는 바람에 그거 씻어 내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찻집에 석유 냄새가 진동했다.
아무려나 사뭇 눈은 내리고 축대 옆 대나무들이 무거운 눈을 맞고는 휘휘 늘어진다.
언제나 혼자인 게 좋다.
혼자이길 잘했다.
한번 만나면 우연이고 두 번 만나게 되면 인연이라고.
그럼 세 번 만나면 무엇입니까?
세 번 만나면 불륜이다.
농담인 듯 웃었지만 실은 깊은 의미가 있는 말이었다.
굳이 만나야 할 일을 만들지 말자. 여러 번 만나면서 생기는 미움과 실망.
미워하는 사람을 만들지 말자. 사랑하는 사람을 만들지 말자.
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 괴롭고, 미워하는 사람은 만나서 괴롭다.
다시 읍내로 나와 이번엔 곡성성당을 찾았다.
눈은 그치고 햇빛이 나니 눈이 부시다. 짜장 화이트크리스마스다.
이곳은 정해박해의 아픈 역사가 있는 성지다.
당시(1827) 잡힌 신자들에 대한 고문이 워낙 잔인해서 신자들은 대부분이 배교를 했다 한다. 순교자가 많은 다른 박해성지와 다른 점이다.
성당 안에서 성탄미사의 노랫소리가 흘러나온다.
궁금해 좀 들여다보고 싶었는데 차마 못하고 뒤꼍 옥사 쪽으로 가 거닐다 돌아나왔다.
메타세쿼이아길.
곡성 여행지를 검색해보면 기차마을과 함께 검색되는 곳이다. 아주 짧은 길이다. 멋은 있지만 그저 보이는 게 다다.
나는 언제부턴가 이 메타세쿼이아길 마니아가 되었다. 이 나무는 혼자 서 있는 건 아무 매력이 없다. 반드시 줄지어 길게 이어져 있어야 아름답다. 되도록 울창하고 길게.
이곳은 영화 <곡성> 촬영지다. <영화거리>로 지정하고 몇 가지 조형물을 꾸미긴 했는데 영 조악하고 빈약하다.
그럴 수 밖에.
영화촬영지라고 해서 영화의 거리가 될 수는 없다, 전국에 영화나 드라마 안 찍은 곳이 어디 있으랴.
곡성터미날 대합실.
하다못해 연탄난로 하나 없이 춥고 을씨년스럽다.
이루 : 흰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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