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한국의 아름다운 길

하늘재를 넘어 덕주사로

설리숲 2023. 8. 15. 22:45

신라 경순왕은 나라를 들어 왕건에게 바쳤다.

 

마의태자는 신라 중흥의 여망을 안고 궁을 떠났다.

덕주 공주가 동행했다.

그들은 문경에서 월악산으로 향했다.

남매가 넘었다는 고개가 하늘재다. 하늘재는 조령과 이화령 훨씬 이전부터 영남과 경기를 잇는 가장 오래된 교통로라고 한다.

 

하늘재를 넘어 태자는 미륵사에, 덕주 공주는 수안보 근처에 머물며 신라의 중흥을 발원하며 기도를 드렸다.

태자는 미륵입상을 세우고 공주는 덕주사에 마애불상을 새겼다.

석공도 아닌데 미륵입상을 세우고 여자인 덕주는 마애불상을 새기다니! 옛날 사람들은 죄다 능력자다. 옛 역사를 접하다 보면 불가사의하고 의문이 생기곤 하는 대목들이다.

아무개 대사가 무슨 절을 지었다는 건 허다하고, 선덕여왕은 황룡사 목탑을 세웠다.

거북선을 정말로 이순신이 만들었을까. 직접 망치와 끌을 들고?

하긴 경부고속도로는 정주영이 깔았고 갤럭시는 이건희가 만들었지.

서울숲은 이명박이 만들었고.

 

 

나는 마의태자가 넘었다는 그 길을 따라나섰다.

 

숲은 짙은 초록으로 우거지고 하늘은 맑디맑다. 여름의 절정이다.

 

 

 

 

 

 

문경 쪽은 아스팔트 포장도로라 폭염 속, 게다가 오르막은 걷기에 적당하지 않다.

 

 

 

 

 

 

통상 하늘재라 함은 고갯마루에서 충주 쪽으로 내려오는 슾속 트레킹 길이다.

 

 

 초록 세상이다.

홍난파의 노래는 운무 데리고 금강에 살으리랏다 했듯이 만약에 내가 말년에 하늘재 숲에 산다면 초록을 데리고 살게 되리라.

 

 

 

 

 

 

 

 

 

 

하늘재 숲길을 다 내려오면 미륵리다. 지명부터가 불국토를 꿈꾸었던 옛 사람들의 염원이 느껴진다.

 

신라 때 이곳은 교통의 요충지여서 원()이 있었다. 큰 저자였다는 말이다. 또한 문헌으로만 남아 있는 미륵대원이 있었다. 지금은 미륵세계사라는 절이 있다.

 

미륵리원터.

어쩌면 이곳은 마추픽추 버금 가는 유적지였을지도 모른다.

 

 

곳곳에 나말여초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흔적들이 산재해 있다.

 

조선시대에 조령이 개통되면서 이곳 하늘재와 일원의 흥성했던 역사가 급격히 쇠락해 현재도 오지로 남아 있다.

 

 

 

 

 

 

이것이 마의태자가 세웠다는 여래입상이다.

보수공사 중이라 가까이 가지 못했다.

 

 

 

 

 

태자는 금강산으로 떠나고 공주는 수안보에 남아 덕주사에 의탁했다.

나는 이번에는 덕주공주의 길을 따라가기로 했다.

 

미륵리에서 이십 리 조금 여린 월악산계곡에 덕주사가 있다.

이곳의 물이 참말 깨끗하다.

절정의 혹서기라 피서객들이 넘실댄다.

 

 

 

덕주사.

가람의 배치가 조금 특이한 것 말고는 여느 절과 별반 다르지 않은 흔한 사찰이다.

 

태자는 금강산으로 들어가고 덕주공주는 이곳 월악사에서 여생을 살았다.

그 이후에 사찰명이 덕주사가 되었다.

 

여기서 천여 년 전 덕주 공주의 숨결을 잠깐 느껴 보고는 계곡을 따라 더 올라갔다. 공주가 조성했다는 마애불을 보기 위해서였다.

 

 

 

 

 

 

1.5km 남짓의 계곡길인데 제법 가파르다.

사뭇 돌계단으로만 되어 있어 폭염 속의 오르막은 구도자의 고행을 방불케 했다.

 

힘들고 고통스러울 땐 상념을 버리는 게 수다. 그저 앞에 놓인 길만 가는 것이다.

목적지가 염두에 있는 순간 집착과 고통이 생긴다.

 

우리가 죽음을 목적으로 태어난 건 아니잖은가.

살고 사랑하고 부딪치며 하루를 살고 또 하루를 살다 보니 어느덧 목적지가 아니었던 죽음 가까이에 이르렀듯이.

 

 

 

 

땀을 쏟으며 무념무상으로 오르다 보니 어느 결에 숲 사이로 마애여래불이 나타나셨다.

 

거대한 암벽의 미륵부처.

불심을 떠나 작품 자체가 훌륭한 문화재다. 이걸 공주가 조각했다고? 말도 안 되지만 어쨌든 누구의 작품인지 경외감이 일었다.

이 깊은 유곡에 위대한 미술품을 남긴 위대한 예술가의 처연한 생애.

 

유난히 경건한 삼배합장으로 이번 순례길을 마친다.

 

 

 

 

 

 

 

나약한 중생들은 수만 가지의 소원들을 안고 산다.

그런데 사찰에서의 기와불사, 또는 연등에 올리는 소지에 적는 소원을 보면 모두가 하나 같이 건강기원이다.

이렇게 단순한 게 실은 가장 절박하고 절실한 것이다.

억만금이 있은들 아프고서야  아무 소용이 없으니.

 

나를 돌아보다가 과연 그렇다고 깨단한다.

그동안은 몰랐더니 이제사 건강의 위대함을 조금씩 절감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자.

오래 살길 기원하지 말고 건강하게 걸어가는 걸 기원하자.

그리고 감사하자.

 

 

마애불 앞에서 바라본 월악산.

 

천년 전에도 저 모양으로 있었을까. 한 나라의 흥망성쇠를 고스란히 지켜봤을까.

마의태자의 슬픈 뒷모습도.

 

 

 

 

 

 

   사라 브라이트만 : Dust In The W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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