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초록의 茶園에서

[스크랩] 겨울 지나 여름

설리숲 2010. 6. 11. 23:42


 

 

 짧은. 너무나도

 짧은 봄.

 잎차 작업을 마치고 나서 드라이 기간에도 이상 저온으로 으실으실 춥더니만

 불과 열흘 남짓에 대기는 용광로처럼 이글거린다.

 봄이 언제 다녀가긴 했을까.

 하긴 꽃이 피고 녹음이 이리 우거졌으니 아니 온 건 아니지만.

 

 늘 그렇듯이

 돌아보면 아득하기만 한 나날들.

 짙게 뱄던 손바닥의 찻물도 이제는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저 한바탕 꿈을 꾼 듯 가물가물 떠오르는 여린 기억들.

 그 실낱같은 기억들마저 죄다 사라지기 전에

 또 이렇게 기록을 남겨 두어야겠다.

 

    

 

 

 

 

 아주 긴 준비

 

 여느 때보다 일찍 산청엘 왔다.

 그리고 여느 때보다 훨씬 늦게 일이 시작 되었다.

 겨울이었다. 강원도에서 나올 때 두툼한 겨울옷을 걸쳤다.

 겨울은 5월에도 완전히 물러나지 않았다.

 지겹고도 지루한 겨울이었다.

 준비 기간도 아주 긴 해였다.

 

 

 

 잔인한 4월

 

 늦도록 내리는 눈. 매서운 추위.

 진주문화예술회관 기타연주회에 가는 그 밤에도 바람 몹시 불고

 어깨 추썩이도록 추웠었다.

 저온에 눈에 또 찬비에... 소식에 의하면 강원도엔 4월 28일까지 눈이 내렸다.

 찻잎은 냉해를 입고 애가 타도록 피어오르지 않았다.

 

 4월 28일 비로소 첫 차를 따는 날,

 그러나 아침부터 폭우가 내렸다. 출발이 김샌다.

 적은 양이지만 어쨌든 첫 차를 덖다.

 그리하여 예년보다 열흘 이상 늦게 차작업에 들어가다.

 4월은 그렇게 잔인했다.

 

 

 

  싱그런 5월

 

 하나 둘 선수들이 모여들고 본격적인 생활에 돌입했다.

 매일같이 자정을 넘긴다. 어쩌다 한 시간 일찍 끝나는 날이면

 다들 여유를 부려 뒤풀이를 하고 싶어 한다.

 무시로 벌어지는 학예회.

 이름표를 붙여 내 가슴에 확실한 사랑의 도장을 찍어...

 독특한 캐릭터(?) 윤별의 트로트는 뒤로 넘어가도록 엽기적이었다.

 다들 한 가락씩 불러 제끼는 흥성한 분위기 속에 몸은 피곤해도

 어렵지 않게 큰 고비를 넘겼다.

 서지농원에 학생들이 MT를 다녀가곤 한다. 드라이를 하다가

 내다 본 창밖 저만치로 어여쁜 그들이 보인다.

 저들끼리 떠들어대고 장난치고 넘치는 청춘의 기운을 발산한다.

 5월처럼 싱그런 모습들. 그냥 보기만 해도 아름답고

 웃음이 저절로 나오는 젊은 그들.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을까.

 봄은 허무하게 빨리 사라져 버리고 겨울은 너무도 일찍 온다.

 그 싱그런 젊은이들은 아직은 알지 못할 것이다.

 앞에 놓인 길이 실은 그리 길지 않다는 사실을.

 그렇게 5월도 가고.

 

 

 

 

  비 오던 날

 

 올해 멤버들은 끈질기게도 잘 버텼다.

 누구 한 사람 중간에 빠져 나가지 않았다.

 독하기도 하지.

 아마 이것도 기록이 아닐까 싶다.

 내가 스타트를 끊었다.

 반천을 떠나오던 그날 모두 다리까지 나와 배웅을 하던 정의.

 이런 게 사람의 정이구나.

 여러 해를 드나들면서 한번도 가 보지 못했던 배바위.

 어찌 내게는 그리 인연이 없었는지.

 억수로 비가 오는 날, 아랫도리를 흥건히 적시고 비로소 올라본 그곳.

 세상은 온통 초록빛이었다. 비에 젖은 숲은 한층 더 푸르렀고

 그 풍경 안에서 사람은 더욱 푸르렀다.

 소원을 이룬 셈이다. 이젠 더 이상 배바위를 선망하지 않아도 되겠다.

 

 

 

 

 

 

 

 

 

 

  그들이 가르쳐 준 것

 

 지난해에 딱새 한 쌍이 우리를 즐겁게 했다.

 둥지를 짓는 것부터 새끼가 이소할 때까지 우리들과 교감을 나누며 동고동락했다.

 첫 날갯짓이 서툴러 번번이 당에 떨어지는 걸 몇 번이나 올려 주었는지 모른다.

 차방에 들어와 제 집인 양 활개 치던 것 하며.

 

 그 녀석들이 다시 온 건지 아님 그 새끼가 고향을 찾아 온 건지

 올해도 역시 딱새 부부가 보금자리를 틀었다.

 딱하게도 철제 빔 속에다 알을 낳았다.

 그 안이 안전하긴 해도 하루 종일 사람들이 들끓는지라 먹이를 물어 나르는 게

 여간 성가시지 않았을 터,

 그럼에도 기어이 부화를 시키고 마는 경이로운 사랑.

 생각해 보면 악한 마음이 없으면 사람과 짐승도 의심과 경계 따위가

 있을 리 없다. 우리에게 독기가 없는 것을 새들은 그냥 느낌으로 안다.

 그러기에 같은 공간 안에서 역시 인연을 맺고 지내는 것이다.

 

 풀가실의 토끼도 역시 사람의 정을 알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선하면 결코 악행이 되어 돌아오지 않는 법이다.

 토끼가 그걸 깨우쳐 준다. 다만 토끼 본연의 야생성을 잃고

 필요 이상으로 인간화 될까 그게 염려다.

 딱새의 날기연습은 보지 못하고 떠나왔지만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한 방법을 새삼 본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여름

 

 강병규 선배님, 전항성 선배님, 하정미 씨, 김현지 씨, 한양중 씨,

 양미점 씨, 유상훈 씨, 권순일 씨, 윤별 씨...

 별다른 사고 없이 무사하게 하산하게 된 것에 감사하고,

 서로의 허물을 다 감싸고 돈독하게 정을 이어 준 선배 후배들에 감사하고,

 그윽한 다향 속에 노닐 게 해준 덕산 내수 아지매들도 감사하고,

 고적한 심사를 달래 준 나의 오카리나에게도 감사를 전한다.

 

 떠나오는 날 황간의 포도밭으로 농활을 갔었다.

 포도밭에서 웃고 떠들면서 들었던 이야기 하나.

 현지 씨가 너무 야하다고 하면서도 거침없이 한 이야기가 그것인데,

 포도밭에서는 더 첨가된 것이 있다.

 

 여자랑 거시기를 하다가 죽으면 복상사라 하지.

 다른 여자랑 하다가 죽으면 객사,

 거리 여자랑 하다가 죽으면 비명횡사,

 할머니랑 하다가 죽으면 봉사,

 

 마누라랑 하다가 죽으면 순직.

 

 머 웃거나 말거나...

 

 다들 고맙습니다.

 좋은 인연입니다.

 

   - 숲에서 홍림----  

 

                

 

 

 

 

출처 : 산청제다
글쓴이 : 김홍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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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지나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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