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숲에서

박탈된 자유

설리숲 2015. 2. 27. 23:13


 

 내 오두막에서 쳐다보면 산 능성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고 그 산마루 어디에 눈알 하나가 골짜기를 내려다보고 있다.

 카메라다.

 용도는 산불감시용이라지만 놈이 감시하는 건 실상은 나다. 내가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는 것부터 저녁에 물 길어 오는 것, 빨래와 설거지, 외출했다가 돌아오는 것까지 세세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다. 내가 마당에 나와 서서 오줌을 깔기는 것도 지켜보고 있다.

 

 아이구 저놈의 카메라. 저놈의 눈에 혹사당하느니 산불이 나는 게 더 낫지 않겠나, 더러는 이런 극단적인 생각도 하곤 한다. 산림청 관계자가 늘 그 화면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사는 게 영 꺼림하다. 내게 오는 손님도 예외 없이 노출되니, 그 담당자, 오호 저 아저씨 여자가 또 왔네, 이번엔 또 다른 여자네 이러구 히히거리고 있지 않을까.

 

 적막한 산속 생활도 이럴진대 지금 우리 시대는 뱀눈의 시대다. 어딜 가나 그놈의 CCTV가 눈알을 희번덕이며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다. 유신정권의 국민감시는 감히 비교도 못하게 최첨단시설로 모든 인간들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애인과 데이트를 하며 어두운 골목길에서 사랑의 키스를 나누는 것도 지켜보고 있고, 술을 한 잔 먹고 요의가 느껴져 담벼락에 오줌을 싸는 것도 적나라하게 감시하고 있다. 오줌 싸는 건 경범죄니 법대로 하면 다 잡혀갈 노릇이다.

사람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라 마치 TV쇼에 출연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 심하게는 가식적인 행동으로 영위하려 하지 않을까.

 

 

 나는 이 감시카메라에 부정적인 입장이다. 물론 덕분에 범죄자 검거율이 월등 높아졌다고 한다. 그럼 목적은 범죄자를 잡기 위한 것인가. 전 국민을 잠재적인 범죄자로 설정해 놓은 건가. 그렇다고 범죄가 줄어들었나. 통계를 보면 아니다. 검거율은 높아졌지만 그렇다고 범죄율이 줄어들지는 않았다.

 부녀자나 아이에게 나쁜 짓을 하려는 치한은 카메라가 있어도 범할 건 다 범한다. 카메라가 범행을 막지는 못한다, 단지 사후에 잡을 뿐이다.

 

 그보다는 잃어버린 인간의 권리는 어쩔 것인가. 사람 사이의 정은 진즉에 메말라 버렸다. 과학은 인간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차라리 차를 세워 놓고 서로 잘했다고 언성 높여 싸우는 게 낫지 차마다 블랙박스를 설치해 서로서로 감시하는 이런 세상. 혼자만의 편안한 공간인 차안의 생활도 낱낱이 공개되고 사적인 대화도, 여성과의 사무적인 동승도 의심의 씨가 되고 마는 삭막한 세계. 마치 예전에 보던 미래의 공상만화 같다.

 

 

 요즘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읽고 있다. 예전에 내가 써 보겠다고 나름대로 구상을 해서 친구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그런 내용의 소설은 벌써 나와 있다고 아서라 했었는데 바로 그 소설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느끼는 감정은, 이제 과학은 더 이상 발전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어차피 인간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해 과학이 필요했을진대 그것으로 인해 인간이 피폐해져 가고 있는 이런 맹랑한 현상이란....

 

 



                                    보이 조지 : The Crying G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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