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햇빛 속으로

비 내리는 시골 차부에서

설리숲 2014. 12. 3. 23:47

…… 중학교 때 단체 검진이 있었다. 그 달장근 뒤에 담임이 불렀다. 담임의 책상 위에는 철끈으로 묶은 진단서가 놓여 있었고 영묵이 들어가자 담임이 종잇장을 넘겨 그의 진단서를 폈다. 그리고는 심각하게 그것을 들여다보더니 영묵을 쳐다보며 이마에 주름을 잡았다.

 “기중이가 말이야, 결핵기가 좀 있는데…… 글쎄 뭐 그리 심각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좀 조심해야겠어. 언제 한번 병원 가서 정밀진단 좀 받아 봐. 알지, 인성병원?”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서 나오는데 교무실의 하얀 회벽에 때마침 노을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아, 아름답다.

 그러나 영묵은 재검진을 받으러 가지 않았다. 그래도 별탈이 없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이학년 때 마른기침이 나기 시작했다. 아, 이게 폐병이로구나, 나는 이제 죽는구나. 그래도 죽음이 별 두렵지 않았다. 다만 밖으로만 떠돌아다니는 아버지에겐 희망도 기대도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가엾은 어머니를 두고 먼저 하직한다는 죄스러움이 덩어리로 맺혀 울컥 목구멍이 막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내 중편소설 중의 일부분이다. 이 부분은 자전적인 일화로 실제로 내겐 결핵이 있었다. 아니 사실은 있었는지 없었는지 확인이 안 된다. 여러 증세와 정황상 그랬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나중에 어머니가 어떻게 아셨는지 성화에 성화를 바치다가 기어이 강제로 나를 병원에 데리고 가셨다. 이런저런 진찰을 하고 나서 의사는 어머니가 궁금해 하는 시원한 말은 해주지도 않고 나부죽한 용기 하나를 주며 집에 가서 가래침을 받아 오라 하였다. 어머니는 소중한 보물인 양 용기를 손수건에 싸서 집으로 가지고 오셨다. 그러나 그게 끝이었다. 도대체 나오지도 가래침을 어떻게 받는단 말인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번도 가래침이란 걸 모른다. 남들은 잘도 뱉는 가래침을, 특히 담배 피는 친구 녀석들은 걸핏하면 칵, 하고 잘도 뱉는 그것이 내게는 평생 생겨 보질 않았다. 어머니는 날마다 성화를 해 대셨지만 별 도리가 없는지라 성화도 차츰 누그러지고 결국은 포기하셨다. 죽기보다 싫은 병원엘 안 가게 돼 마음이 얼마나 가뿐했는지 모른다. 그까짓 병이야 올 테면 오라지. 인생 뭐 있나 별로 즐겁지도 않은걸. 그리하여 이후로 난 결핵 때문에 병원엘 간 적이 단 한번도 없다.

 

 그리고 지금까지 무병장수(?)하며 잘 살고 있는데...

 한번도 치료를 받지 않았는데 결핵이 퇴치될 수 있을까 의문을 가져본 적도 있었지만 의문에만 그칠 뿐 크게 궁금하진 않다. 어쨌든 나는 완전 건강체니까.

 고백하건대 그 당시 마음 한편은 은근히 내가 폐병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유명한 시인이나 소설가들은 대부분 폐병으로 시난고난하면서 그 주옥같은 문학작품들을 쓰지 않았더냐. 당시 나는 꿈꾸는 문학소년이었고 대가들의 불우한 환경이 선망이 될 정도였다. 가난, 질병, 장애 등이 없는 예술은 생명이 없는 시시한 나부랭이로 여겼었다. 베토벤이나 고흐를 보라. 이상이나 김유정이나? 나도 그들처럼 고통 속에서 인간을 구원하는 소설들을 쓰고 싶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나와 결핵은 인연이 없었다.

 

 교무실에서 담임선생님의 경고를 들으면서 본 회벽은 평생 눈에 남아 있다. 그때가 어느 계절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뉘엿거리는 저녁 해가 붉은 색으로 칠한 그 회벽은 얼마나 신비롭고 아름다웠는지.

 

 11월 마지막 날에 추풍령에 있었다. 비가 내렸고 아마 이 비가 가을에 내리는 마지막 비일 것이라 짐작했다. 기실 기상청은 다음 날부터 강력한 한파가 몰아칠 거라는 예보를 한 상황이라 가을은 짜장 11월 말일에 끝나고 12월 1일부터 겨울이겠거니 했다.

 추풍 차부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낡은 지붕에서 떨어지는 지지랑물을 보고 있자니 참 처량하기도 하고 난데없이 삶에 대한 허무감도 들락거렸다. 비가 주는 오묘한 자극인 걸 알면서 자꾸만 멜랑콜리하게 침잠해져 갔다. 그러다가 이어폰을 꽂고 라디오를 듣는데 <싱글벙글쇼>에 위 소설에 썼던 내 중학시절의 에피소드와 똑같은 사연이 소개되는 것이었다. 허참 신기하네. 나나 그 사람이나 다 해피엔딩이니 그저 슬그머니 웃음이 번지고 까닭없이 음울했던 심정이 슬그머니 가시었다.

 

 가을과 겨울의 경계, 충청과 경상의 경계 추풍령에서 삶과 죽음을 기다리며...

 

 담배는 절대 피지 맙시다. 나도 여느 아이들처럼 담배를 피웠다면 지금의 내가 아니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수도 있고. 어쩌면 폐병으로 고생하면서 인간을 구원하는 명작들을 썼을지도 모르지만.

 담뱃값도 오른다는데 이젠 다들 끊읍시다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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