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발소를 안 간지 20년도 더 되는 것 같다. 언제부턴가 내내 미용실에만 다녔다.
미용실이 여러 모로 편리하고 좋다. 값도 싸지 시간도 빠르지 숫자도 많아 찾기도 쉽지. 그러나 무엇보다도 섬섬옥수 보드라운 여자의 손이 만져 주는 촉감이 좋다.
어쩌다 남자 미용사를 만날 때가 있다. 드라마에서 보듯 정말로 남자 미용사는 목소리가 간드러진다. 어서 오셔요~ 특별히 다른 짓을 한 것도 아닌데 그의 중성적인(또는 여성적인) 언행이 참말 간지럽다. 심지어는 소름이 돋고 혐오스럽기까지 하다. 그 손에 내 머리를 맡기고 싶진 않으나 이미 발을 들여놓고는 되돌아 나가지를 못하겠다. 이 소심함이여.
다시 장발이 유행될 조짐이 보이는지라 길게 머리를 길렀다가 아무래도 자르는 게 그래도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 더 기를까 자를까를 고민하다 에라 다부지게 맘 먹고 미용실엘 갔다.
발을 제끼고 들어서니 어수선한 소파에서 남자 하나가 일어서며 어서 오시라고 한다. 오잉! 여기도 남자 미용사? 그러나 아니다. 안에 대고 외치니 여자가 나온다. 그럼 그렇지. 아무리 봐도 남자는 미용사 꼴새가 아니다. 나이가 들어 보였고 맨드리가 와이셔츠에 검은 양복바지다. 이 집 남편인 게 분명해 보인다.
여자에게 머리를 맡겨두고선 별 씨잘데기 없는 걸 생각한다. 이 시간에 저 남자는 왜 마누라 가게에 빈둥대고 있을까. 그 유명한 셔터맨인가.
나 소싯적에 젊은 총각들에게 미용사는 일종의 로망이었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지만 그때는 상당한 고소득을 올리는 게 미용사들이었다. 우리끼리 낄낄대며 하는 농담으로 아침에 마누라 가게 셔터문만 올려 주고나면 하루종일 내 세상이라고. 차 끌고 여기저기 낚시나 다니고 그거 싫증나면 동네 다방이라도 다니면서 히죽거리다가 저녁에 셔터문만 내려주면 된다고. 사내 팔자 그것보다 상팔자가 어딨냐고. 마누라 돈 잘 벌지. 나 바람 안 피면 만사 땡이니까.
예전에 신분 낮고 천한 여자의 남편을 '고추박이'라 했다. 특히 무꾸리의 남편들이 그에 속했다.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면서 마누라가 버는 걸로 먹고 입고, 가끔 고추나 박아주는 걸로 생활을 한다는 의미인 걸로 안다.
참내! 젊은 놈들이 그래 미용사 마누라 얻어서 고추박이 노릇이나 하는 걸 소원하다니 원 그런 모자란 놈들이 어딨더냐.
그 오후의 그 사내도 내 짐작엔 딱 고추박이였다. 그래도 그렇지 마누라 직장에 와서 번둥거리는 건 뭐냐. 손님들이 드나들고 하는델 사내가 떡하니 지키고 있으면 꼬라지가 어떻다는 걸 저도 모르지 않을 텐데.
그랬더니 이건 또 뭐냐. 머리를 다 자르고는 감아야 하는데 아 글쎄 사내가 감겨 주는 거다. 에구. 난 남자가 만져주는 건 정말 싫단 말이다. 그건 그렇고 이 남자는 그저 빈둥거리기만 하는 고추박이는 아니로구나. 그래도 제 밥값은 하느라고 손에 물은 묻히는구나.
그렇지만 이건 아니다 싶은 건, 대부분의 손님이 여자들일진대 저렇게 사내가 머릴 감겨 주면 그리 썩 좋아하지는 않을 것인데.
그냥 셔터맨으로 지내는 게 낫지 않을까. 본인이야 손이라도 덜겠다는 갸륵한 마음이라지만 제 삼자인 내가 보기에 공연히 안쓰러워지기도 하는 것이다.
'고개 숙인 남자'라는 신조어도 있지마는 어디 그 사내뿐이랴. 요즘 도처에 고개 숙인 남자들이 널려 있는 세태다. 그나마 고추라도 박을 힘이나 있으면 모르지만 그것마저도 엄두를 못 낼 사내들이 부지기수인 것이다.
살다 보면 좋은 날 있겠지. 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결코 미워하거나 노하지 말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