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한 시가 넘어 자정이 가까워 온다.
전동차 안은 이제 한산하다. 여기저기 빈자리가 보인다. 피곤에 절은 사람들. 30~40대로 보이는, 직장인일 것도 같고 또 가장일 것도 같은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인다. 고단한 몸을 가누지 못해 금방 쓰러질 것도 같다. 술 한잔 걸친 이도 있다. 잔뜩 머리를 수그리고 연신 중얼중얼 혼잣말을 한다. 내 맞은 편 젊은 처자는 내내 전화기에 대고 속살거린다. 그 목소리에도 삶의 고단이 잔뜩 묻어 있다.
참 안됐어
옆자리의 친구에게 내가 중얼거렸다.
저렇게 지친 몸으로 몇 시간 뒤면 또 일어나서 꾸역꾸역 회사로 나가야겠지? 선택의 여지는 없으니...
아님 저렇게라도 나갈 수 있는 직장이 있으니 행복한 건가?
시간은 냉정하게 길을 재촉하고 자정이 넘도록 전동차는 대도시의 깜깜한 지하 동굴을 뚫고 그저 달려간다. 무엇을 위해 우리는 저토록 몸을 혹사시키는가. 생각해 보면 우리 인간이 가장 불쌍한 족속인 것도 같다. 틈틈이 맞는 즐거움이란 일을 해야 하는 절박과 고통에 비하면 정말 구우일모다. 그것마저도 포기하고 우리는 날마다 머리가 터지도록 몸이 부서지도록 생업에 매달려 가간다. 평생을.
어릴 적 이발소에서도 보았고, 누이의 노트에서도 보았던, 또는 어디에서도 흔하게 보았던, 액자에 예쁘게 들어앉아서 어린 아이들을 향해 삶의 지침을 내리곤 했던 시가 있었다.
삶.
푸시킨이 뭔지도 모르고 어린 아이의 뇌리에는 늘 삶과 푸시킨이 조치개처럼 같이 따라다녔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결코 노하거나 슬퍼하지 말라.
그랬는데,
그땐 푸시킨이란 낱말은 정말 무의식이었는데 어른이 되면서부터, 그것도 나이가 이만큼이나 되면서 차차 푸시킨의 그 싯구절이 마음 가까이 다가온다.
슬픔의 날을 참고 견디면 언젠가 기쁨의 날은 오리니
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그리워지나니.
늦은 밤 전동차의 지친 삶들을 보면서 나는 머언 먼 옛적의 푸시킨을 생각했다.
이튿날 아침.
승강장 벤치에는 젊은 아가씨가 울고 있었다. 아니 몸을 못 가누고 의자에 수그리고 앉은 폼새가 내겐 우는 것처럼 보였다. 저 아가씨는 또 어떤 사연이 있는가. 술이라도 먹었을까. 이른 아침에 정신을 못 가눌 정도로 애절하고 절박한 사연이 있는 걸까. 서울메트로 직원 서넛이 난감한 표정으로 그 앞에 서성거리고 섰다. 부축하려고 손을 대면 냉갈령을 부리며 뿌리친다. 우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고 있는 걸 즐기는 것 같기도 하다. 그 고단한 작은 몸에도 삶의 무게는 둔중하게 내리누르고 있었다.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결코 노하거나 슬퍼하지 말라.
우리에게 삶은 늘 무겁고 고통스러워만 보인다. 하루종일을 달려도 전동차는 늘 깜깜한 지하 속만 헤매고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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