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하나를 세를 주었다.
젊은 총각이었는데 여주인이 그만 총각에 반하고 말았다.
처음엔 여관방을 전전하며 즐겼는데 여관비가 아까워 그냥 집에서 하기로 작정하고는 꾀를 낸 것이,
남편이 워낙 커피를 좋아하는지라
밤마다 커피에다 수면제를 타서 골로 보내놓고는 총각 방으로 들어가 마음껏 즐겼는데,
꼬리가 길어 그만 남편에게 들켰다.
경찰이 다그쳤다.
“아줌마! 하고 싶음 어디 밖에 나가서 하든지 해야지 남편이 잠들어 있는 집안에서 그럴 수가 있어요? 양심의 가책을 못 느꼈어요?”
여주인 왈,
“남편한테 아주 많이 미안할 때가 있긴 있어요”
“언제요?”
“커피가 맛있다고 한잔 더 타 달라고 할 때요”
이런!!
커피를 좋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옛적에,
커피가 귀하게 대접받던 시절이 있었다. 그건 아무나 마시는 게 아니었다. 제법 산다하는 집에서나 고상하게 마시는 신의 음료였다.
하긴 너나없이 못살던 그때, 시골 촌놈들은 손바닥만 한 농토에 엎드려 평생을 기었고 그러면서도 해마다 보릿고개를 넘어 겨우겨우 생을 연명하며 결국엔 허리가 직각으로 구부러진 말년을 보내다가 또 그 자식놈이 농사를 짓는 걸 보며 생을 마감하던 그때.
도시 빈민들은 그나마 먹을 들나물 따위조차 없어 넝마를 줍거나 비럭질을 해가며 희망 없는 팍팍한 시절을 살고 있었다. 언덕바지 다닥다닥 붙은 판잣집이며 골목마다 쌓이는 연탄재들. 새벽부터 깨어 울어대는 아이들. 시골서 상경한 처녀총각들, 그들은 하루 열다섯 시간 이상을 공장에서 지냈다. 모두들 더 나은 삶을 꿈꾸지만 세상은 너무나도 암울했다.
그런 시절에 먹어서 배도 안 부른 커피 따위가 가당키나 할까. 커피는 고상한 사람들의 럭셔리한 물이였다. 하여 좋아하는 여자가 생기면 다방에 데리고 가서 기분 내며 커피를 마셨고 그럴 때 한껏 폼을 잡아 보는 것이다. 다방은 젊은 아베크족들의 전유물이 되었다.
그러다가 차츰 서민들도 그 고상한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어릴 때라 모르지만 아마 커피 값이 떨어졌는지도 모른다. 내가 소년시절을 보낸 후평동의 변두리에서도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 제법 늘어났다. 도시라곤 해도 여전히 농삿일을 주업으로 하는 촌동네였다. 다들 셈평이 나아졌는지도 모른다. 손님이 오면 귀하게 커피를 내놓았다. 그럴 때 주인의 얼굴은 얼마나 행복해 보였는지. 우리도 이런 고상한 거 먹는 집이라는 걸 은연히 내보일 수 있다는 그 자존감. 정말이지 커피 한잔을 마시고 있으면 스스로 우아하고 고귀한 신분의 사람이 된 듯 처절한 자기체면이었다. 그런데 그 고상한 물을 평소에는 먹지 않는 걸로 보아 아마 별 맛을 알지 못했던 것 같다. 그저 어쩌다 오는 손님에게 보이기 위한 일종의 허영기로 보인다.
어쨌든 커피가 나지 않는 우리나라에서 그 시절 커피는 신분을 상징하는 잣대이기도 해서 도시 변두리 사람들은 그 신분상승의 어눌한 욕구를 커피로 채웠다. 그리고 젊은이들은 걸핏하면 다방을 드나들었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야 커피를 맛보았다. 당연히 학생들은 마셔서는 안 되는 걸로 알았다. 중학교 어느 연분에 누구 아이디어인지 매시간 수업하러 들어오는 선생님을 위하여 커피를 한잔씩 교탁에 올려놓은 적이 있었다. 물론 며칠로 끝났지만 어떤 선생님은 아주 고마워하며 기꺼이 마셔 주었고 가끔은 커피를 싫어하는지 손도 안대고 마는 선생님도 있어 수업시간 내내 교탁에서 식어 버리기도 했다. 그걸 뭐 먹을 거라고 선생님이 나가자마자 냉큼 덜려들어 꼴깍꼴깍 마셔 버리는 녀석도 있었다. 드럽게도 근천스럽네. 그게 얼마나 비천해 보였는지 나는 속으로 혐오해 마지않았다. 그러면서도 커피가 어떤 맛일까 강한 호기심이 없지도 않았지만.
다방엘 처음 들어가 본 건 고3때였다. 무슨 집안 행사였을까. 마석에 사는 누이 집에 가족들이 갔다가 어찌어찌 그럴 일이 있어 들어간 다방이었는데 범생이였던 나는 역시 쭈뼛거렸다. 학생은 다방엘 들어가면 안 되는 걸로 알았으니까 게다가 교복까지 입고 있었으니 몸은 앉아 있었으나 마음은 몹시 불편했고 자꾸만 주위를 힐끔거렸다. 되돌아보면 참으로 못났다. 커피는 안 먹고 나는 요구르트를 마셨다. 내가 원한 게 아니라 작은 형이 범생이 학생인 나를 위해 시켜준 것이다. 그렇지. 학생은 커피를 마시는 게 아니니까. 그 당시 ‘나의 20년’이라는 노래가 유행했는데 ‘커피를 알았고 낭만을 찾던 스무 살 시절에 나는 사랑했네 어쩌구’ 하는 가사도 있었으니 또 어찌 생각하면 그 당시의 내가 그리 못난 것도 아니었다. 노래가사에도 스무 살 시절이라 했으렷다.
이후로 이제껏 나는 많은, 정말 엄청난 양의 커피를 마셨고 지금도 마시는 중이다. 대충 어림잡아 계산해도 2만 잔 이상은 족히 마셨고 하루 석 잔씩 계산한 게 그 정도고, 직장생활 할 때는 하루 열 잔 스무 잔이 보통이었으니 모르긴 몰라도 3만 잔은 먹어대지 않았을까. 커피가 긍정적인 약효도 있지만 부정적인 것도 있으니 3만 잔이 몸속에 들어갔다 생각하면 정말 내 몸은 달창날 대로 달창났지 싶다.
고교를 졸업하고 애들과 어울려 여기저기 다방엘 많이도 다녔다. 그때 커피 값이 300원. 어느 때는 돈이 모자라 다섯 명이 들어가서 두 잔만 시켜 먹을 때도 있었다. 어린 청춘들의 치기가 가장 빛을 발하던 시절이었다. 세상은 너무나도 자유로웠고 우리 청춘의 색깔은 너무도 푸르렀다. 고등학생 시절의 어두운 터널을 벗어난 그 해방감이라니.
피카디리 극장 앞 돌다방 아가씨는 너무나 예뻤다. 자기 말로는 대학생인데 아르바이트로 있는 중이라고 했고 내가 보기에도 세련된 여대생의 모습이 영락없어서 무척 호감이 가는 아가씨였다. 친구들은 다 뻥이라고, 이런데 있는 애들은 다 그렇게 말한다고 내 연심에 먹칠을 했지만 나는 절대 곧이듣지는 않았다. 저렇게 세련되고 지적인 여자가 일개 레지일 리가 없어. 그렇지만 두 번 다시 그 아가씨를 보지 못했다. 나 혼자 찾아가기엔 뻘쭘했고 친구들을 대동하려니 너무 속보이는 것 같아 미적거리다가 한번도 가 보질 못했다.
대학교를 초장에 그만두고 백수생활을 할 적에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정확하게는 쓰기 시작한 게 아니라 마음을 두기 시작했다. 모더니즘 문학의 대명사인 박인환의 시를 읽고 김유정이니 황순원의 소설을 읽으면서 얼마나 매력을 느꼈는지 모른다. 그래. 모름지기 세상에 나와서 글 하나 멋지게 쓰고 죽지 않으면 그게 사람이라 할 수 있나. 그 대가들이 글을 쓰거나 문우들과 사교할 때 드나들던 곳이 다방이었다. 그곳에서 고뇌하고 아네모네 마담과 희영수를 하거나 다방 구석에 앉아 하얗게 담배연기를 뿜으면서 원고지를 채우던 모든 작태들이 내겐 근사한 로망이었다. 그래서 나도 한때 원고지를 들고 다방을 출입했었다. 공단 입구에 청솔다방이 있었다. 내 집 근처이기도 해서 몇 번 들러 여자들과 안중도 익힌 터라 구석진 자리를 하나 차지하고는 하루 종일 비비댔다. 마음은 멋진 글을 써 갈기며 세상에 다시없을 명작이 나올 것 같았지만 종일을 앉아 있어도 한 장을 채우지를 못하곤 했다. 기본 밑천이 갖춰지지 않았다. 대문호들의 겉모습만 보았지 그들이 갖추고 있는 소양과 깊은 철학들은 감히 겉도 못 핥았다. 게다가 소설을 쓰려는 의지조차도 박약했다.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지도 모르고 그저 원고지만 앞에 놓고 낙서 수준의 허접한 일기 따위를 쓰면 되는 걸로 알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기껏해야 문학가들의 행태가 멋있어 보였을 뿐이다. 그렇게 다방 구석자리에 앉아 볼펜을 끼적이는 모습이 굉장히 멋있어 보일 거라는 유아적인 착각이었다. 나의 그 인텔리적인 모습에 다방의 여자들이 뻑 갈 거라는 허무맹랑한 도취에 빠졌던 것 같다. 그렇지만 다방의 여자들은 내가 생각하듯 그렇게 고상한 여자들이 아니었다. 그녀들은 하루하루 고된 노동을 견디며 역시 불확실한 내일을 기약하지 못하는 따라지 인생들이다. 하루 한번 이상은 티켓 영업을 뛰어야 하고 한 시간 지각을 하면 사흘치 급료를 떼이고, 정이라곤 눈곱만큼도 안 가는 늙다리들에게 헛웃음을 팔아 칡차 한잔이라도 매상을 올려야 하는 비천한 인생들인 것이다. 되지도 않는 착각으로 자리만 차지하고 앉아 낙서질만 하는 놈팽이의 유치한 놀음에는 미안하지만 눈길조차 주지 않는 부류인 것이다. 아니다. 눈길을 주긴 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지내다 보니 그녀들의 눈빛이 영 거슬렸다. 대놓고 말은 안 해도 이젠 좀 그만 나가 달라는 눈치가 역력한 그런 눈초리였다. 그래 허접한 인텔리겐치아의 노릇도 그만 두고 말았다. 세월이 많이 지난 후 그때의 다방 이야기를 단편으로 하나 쓰기도 했다.
이제는 커피도 흔해졌다. 더 이상 고상한 음료가 아니다. 이제 고상한 사람들은 커피를 안 마신다. 한때는 한집 걸러 다방이라고 할 정도로 다방이 성행했던 시절도 있었다. 비디오가 보급되던 초창기에 다방에서 포르노를 보여 주었다. 매니아(?)들은 어디 어느 다방에서 그걸 하는지 저들끼리 쉬쉬 정보를 공유하면서 포르노를 즐겼다. 다방이 흔해지니 그것도 일종의 상술이었다. 물론 적발되면 개판되는 거지만. 강원대 입구의 어느 다방에 친구와 함께 한번 가본 적이 있다. 토요일 저녁이면 어김없이 포르노를 보여 주는 곳이라 했다. 저녁 어스름부터 빼곡히 자리를 메우기 시작하는 청춘들. 표현할 수 없는 야릇한 흥분들. 그렇게 소년에서 어른이 돼 가고. 그러나 단지 미사여구일 뿐 포르노로 성장한다는 건 돼먹지 못한 말이다. 그제나 이제나 그것은 사람의 정신을 마비시키는 악성바이러스에 지나지 않는다. 어쨌든 우리는 그렇게 어른이 되었다. 커피 한잔 값에 엄청난 신비의 세계를 접하는 정말 경제적인 특구였다.
커피도 세분화 되어서 전문점엘 가면 가짓수가 정말 많다. 내 생각으론 그 많은 종류가 다 맛이 다를까 반의하게 된다. 다 그게 그거일 텐데 보기 좋게 이름만 죽 나열해 놓은 것만 같다. 값도 비싸다. 보통 밥값 보다 비싸다. 아하 이것도 역시 귀족들만 마시는 고상한 음료인가. 그런데 나는 전문점의 커피들이 별로 맛이 없다. 집에서 커피와 프림 설탕을 적당히 배합해서 먹는 게 제일 맛있다. 또한 자판기 커피도 맛있다. 일회용 인스턴트도 맛있다.
제일 맛없는 건 다방 커피다. 레지가 타 주는 것이라 너무 달다. 물론 오래 전의 기억이다. 다방에 안 가 본지가 무척 오래다. 요즘엔 커피 값이 얼마인지도 모른다.
아니다, 오래 전도 아니네. 얼마 전 보은읍의 한 다방엘 로즈님과 들렀었다. 칡차를 마셨는데 두 잔에 만원을 받는다. 어흑 비싸다. 커피는 얼만지 모르겠다. 다방은 가격표시가 없다. 그게 가장 불만이다. 메뉴도 없다. 음성적으로 변모할 개연성이 큰 부분이다.
테이크아웃 등에 밀려 다방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처음엔 변두리로 밀려나더니 그 다음엔 시골로 이동했다. 시골 노인네들이 아직은 다방을 애호한다. 여자들이 오빠오빠 생글생글 웃어 주면 정말로 자기가 좋아 그러는 줄 착각하는 건지 차마 다방을 내대지 못한다.
한가지 또 달라진 건 이제는 시골 다방에도 젊은 레지가 없다는 점이다. 하늘거리는 아가씨들은 어딜 가고 보통 허리 굵은, 내가 보기엔 중년 아줌마 같은 여자들이다. 어쩌다 보게 되는 배달 가는 레지들의 모습이 그렇다.
현재 커피는 가장 널리 대중화되었다. 전문점에서 사 먹는 건 비싸지만(사실은 폭리다. 원가의 몇 십 배를 받는 것이다) 동일가격으로 비교해 가장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는 게 커피다. 이렇게 소비가 많은 커피를 왜 국내에선 생산하지 않을까 늘 의문이었다. 제주도 정도의 환경이라면 얼마든지 재배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소치였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재배는 할 수 있어도 수지타산이 안 맞는다고 한다. 키우고 수확하고 유통하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자면 가격이 엄청 비싸진다는 것이다. 거기에 현재 수입해 들어오는 커피가 워낙 싸니까 도저히 안 된다는 것이다. 커피뿐만 아니라 다른 농산물도 다 이와 같다. 이러해서 맛난 커피는 오로지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현실이다.
일부 아는 척 하는 사람들이 커피 생산지에서의 노동착취를 들먹이며 커피소비를 폄훼하곤 한다. 일당 몇 백원에 어린아이들까지 동원하여 고혈을 짜낸 결과로 즐기는 커피. 일견 맞는 말이지만,
그러나 기아에 허덕이는 그곳 사람들에게 그나마 커피 일마저 없다면 어찌할까. 노동력을 착취하는 사람들을 성토해야지 커피를 먹지 말자 하면 그 사람들은? 과거 우리 처녀들이 노동력을 착취당해 가면서 만들어낸 가발이 한국산업발전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그래도 그 알량한 임금이라도 받아야 생활하는 우리의 선배들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70~80년대 모든 공장은 돌리지 말았어야 한다. 물론 현재도 88만원세대라는 용어가 남의 일이 아닌 현실이다.
그러니 앞으로는 원산지주민들의 노동착취를 들먹여 커피에 대해 태클은 걸지 말았으면 좋겠다. 외려 그들의 생계를 도와준다는 긍정적인 시선이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커피를 무지 좋아한다고 해서 터무니없이 하는 자기합리화는 아니기를.
모든 건 트렌드가 있어 시대에 따라 그 형태가 변한다. 내가 생각하는 그 낭만의 다방은 이미 오래 전에 한 시대를 마감했고, 지금은 다방이라 하면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하다. 스타벅스 따위의 이름은 왠지 세련되고 고상한 것 같고, 같은 이름이라도 커피숍이라 하면 다방 하고는 또 다른 느낌을 받는 것이다. 그래도 다방은 얼마나 친근하고 기특한 이름인가. 죄다 국적도 없는 외국 이름을 내걸어도 오직 다방은 꿋꿋이 제 이름을 지켰으며 이후로 머리방 노래방 피시방 등 친근한 이름들이 다시 돌아오게 한 공로가 크다.
나는 여전히 커피를 즐겨 마시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세월은 흘러 세태는 변하여도 어릴 적 선망하던 그 다방의 추억들은 내내 남아 있을 것이다.
불꽃같은 청춘, 고뇌, 철학, 낭만, 사랑, 문학, 절망과 환희, 고독들이 고스란히 들어 있는 곳. 우리의 다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