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선 기차를 타고 구례 가는 길.
충청도를 지나 전라도쯤에 이르면 창밖 구경도 주니가 나서 대부분 사람들은 잠에 들거나 잠은 아니더라도 시트에 깊게 기대 있기 일반이다.
바로 뒷자리 아가씨들은 서울서부터 내내 쉼 없이 이야기다. 잘 들리지는 않으나 이 여행이 아주 모처럼, 어쩌면 난생 처음 떠난 길인 듯 사뭇 들떠 있는 듯 했다.
기차 안의 모든 것, 또 창밖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죄다 신기해 보여 연신 탄성을 지르고 자기들끼리 묻고 설명하고 까르르 웃어대기도 하고.
아 저처럼 아름다운 시절이 내게도 있었던가. 화양연화(花樣年華).
예전 홍콩 영화의 제목이 떠올랐다. 화양연화란 여자에게 있어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시절을 말한다. 바로 뒷자리의 그 아가씨들이 아마 그 시절일 것이다. 그저 보기만 해도 절로 웃음을 짓게 하는 참 고귀하고 아름다운 청춘이다.
안내 방송이 삼례역에 다다랐다고 일러 준다.
시트를 좀 뒤로 젖히고 깊게 누워 있어서 좀더 뚜렷하게 그네들의 이야기소리가 들린다.
“삼례래”
“오 그럼 구례까지 일곱 번만 더 가면 되겠네”
“아니지. 삼례니까 사 오 륙 칠 팔 구. 여섯 정거장 아냐?”
나는 큭 하고 웃음보를 터트렸다. 아마 아가씨들도 구례까지 가는 모양이다. 삼례까지 왔으니 앞으로 사례 오례 육례... 그렇게 지명이 죽 이어져 있는 줄로 아는 모양이었다.
아 얼마나 천진하고 귀여운 사람들인가. 무지가 아닌 순진으로 나는 느낀다. 몰라도 부끄럽지 않고 실수를 해도 귀여운 저 고귀한 젊음이여!
나를 돌아보면 얼마나 부끄러운 녹이 두껍게 덮여 있는가. 세월을 쌓아 가면서 더불어 쌓여 가는 것들이 그 얼마나 많은가. 고귀한 건 버리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만 잔뜩 짊어지고 가는 어리석은 인생아. 알면서도 생각을 바꾸지 못하는 고집과 집착, 아집들. 순진무구한 그 시절로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나도 오래 멀리 걸어왔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걸어가고 있는 걸까. 저 아름다운 처녀들도 역시 나처럼 그 길을 걷게 되는 걸까. 그렇더라도 당신들은 조금이라도 더 오래 그 고상한 젊음을 지속했으면 좋겠다.
몹시 춥고 폭설이 내린 다음날 삼례읍의 모습이다.
지명이 사람 이름같기도 하고... 아주 토속적이다.
특이하게 삼례랑 왕궁이라는 이름이 같이 불려진다. 행정구역은 다르지만 두 지역이 연이어 있어 삼례라 해도 왕궁이라 해도 같은 곳을 지칭하는 게 된다. 즉 같은 지역이요 같은 상권에 같은 문화권이다. 왕궁 또한 특이한 이름이다. 헨델의 음악을 떠오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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