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햇빛 속으로

가을날의 서정- 정암사에서

설리숲 2007. 9. 10. 02:02

 

 여름은 완전히 갔다.

 정암사 담장 밑으로 소스라쳐 흐르는 물에 찬 기운이 서려 있다. 비온 뒤끝이라 수량이 많다.

 근 2주를 하루도 빼지 않고 내리던 비가 그치고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햇살이다.


 새벽에 화절령을 넘어 왔다. 숲에도 고갯마루에도 풀섶에도 온통 안개 세상이었다. 낯선 곳에서의 신비한 체험이었다. 안개가 끼면 날씨가 쾌청하다. 과연 아침나절에 파랗게 열리는 하늘, 그리고 쏟아지는 햇빛.

 아! 가을이구나.


 일행들을 보내고 정암사를 찾았다.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지은 사찰로서 어쩌고저쩌고...

 수마노탑은 마노로 쌓아올린 탑으로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셨으며 어쩌고저쩌고...


 이런 건 별로 재미없다. 그저 담장을 덮은 이끼라던가 경내의 고요한 적요감 따위가 나는 좋을 뿐이다.

 

 

 

 

 정골사리를 모셔서 불상은 없는 법당. 거기 기단 아래 서서 삼배합장을 한다. 절에 가면 늘 하는 일이다. 삼배합장을 하는 그 짧은 시간은 내게 가장 엄숙한 시간이다.

 

 

 

 

 수마노탑으로 오르는 오솔길로 접어든다. 내가 정암사를 찾는 이유는 부처님을 알현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아무리 봐도 왜 중요한 보물인지 내 안목으로선 알 수 없는 수마노탑을 보기 위해서도 아니고, 선배의 지우인 덕진 스님을 만나기 위해서도 아니다. 수마노탑으로 오르는 그 오솔길을 걷고 싶어서 정암사를 찾는 것이다.

 

 


 이제 곧 낙엽이 떨어져 저 길을 덮을 것이다.

 이 길을 걸으면 나의 가슴은 침잠해지고, 곧이어 사라진 감성들이 되살아난다.

 “난 정태춘 노래를 들으면 글을 쓰고 싶은 충동이 생겨요”

 재작년 이 길을 걸으며 동행한 친구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지극히 서정적인 그의 노래는 시들해진 내 정서도 살아나게 하는 마력이 있다. 더구나 그 노랫말은 얼마나 멋진 문학작품인가.

 하지만 내가 그녀에게 정태춘을 들먹인 건 거짓말이었다. 실은 낙엽이 쌓인 그 오솔길을 걸으면 나는 문학에의 욕구가 강렬하게 생기는 것이다. 문학은 진즉에 때려치웠다고 공공연하게 떠들쳤던 터다.

 그런고로 정태춘을 들먹여 에둘러 표현했던 것이다.


 오늘 내가 이 정암사를, 아니 이 오솔길을 찾은 게 어쩌면 그런 충동을 원해서일지도 모른다.

 다시 글을 써야겠다는 작심을 했다. 지난 뜨거운 여름이었다. 그 문학에의 강렬한 충동을 받고 싶었을 것이다. 낙엽이 돌탑이 돌계단이 뜨거운 그 무엇을 내게 주길 은근히 바랐을 것이다.

 


 오솔길은 호젓해서 좋다.

 혼자서 걷는 길. 인생길도 혼자 걷는다.

 내 앞에 또 내 뒤에도 아무도 없었으면 좋겠다. 그저 혼자 유유자적 고독하게 걸었으면 좋겠다.

 담장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가 세차다.

 

 

 

 

 수마노탑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은 그저 막막하다. 어디로 해서 어디로 가야할지 눈앞엔 그저 첩첩산이 이어져 있다. 아직은 이른 가을이라 온통 푸른빛이다. 저 푸른산도 곧 붉게 물들 것이다.

 

 

 하도 오랜만에 보는 햇빛이라 그저 고맙고 대견하기만 하다. 마당에 앉아 한참 동안 노란 빛을 온몸에 받았다.

 문득 눈에 들어오는 생명.

 노린재 두 마리가 제법 재밌게 얼려 논다. 암수 짝꿍일까. 녀석들 가까이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찍는다. 놈들도 가을볕이 좋아서 저렇게 뙤약볕에 나와 노니는 걸까.

 지금은 저리 한가롭지만 이 가을이 다하고 나면 녀석들은 어디로 갈까. 자신들의 운명을 알고 있을까.

 

 

 

 등골에 송글송글 땀이 맺히는 걸 느끼면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주문을 걸어나올 때 점심공양을 알리는 범종이 두 번 길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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