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부역에서는 두 사람이 내렸다. 원래가 영암선 열차는 승객이 많지 않다. 게다가 승부역은 하루 세 번 정차하는 간이역이다. 이 산악지방은 방금 타고 온 그 기차 아니면 교통수단이 전혀 없는 오지다. 여행관련 책자에는 많이들 추천하는 곳이지만 실제로 도다녀오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모양이다. 내린 사람은 나와 역무원이다.
플랫폼에서 카메라를 꺼내 이리저리 맞춰본다.
- 어디서 오셨습니까?
역무원이 사무실로 들어가려다 말고 묻는다.
영주에서 왔다고 대답하는 나. 자기도 집이 영주인데 지금 출근하는 길이라고 반가워하는 그.
그리고는 친절하게 근처 가볼 만한 곳과 사진 찍을 만한 곳을 안내해준다.
- 여행 잘 하시고요. 이따가 오시면 사무실로 들어오세요. 차 한 잔 드릴게요.
그러지요. 고맙습니다.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다시 올 일은 없다. 이제부터 석포까지 도보여행이다.
기차를 타고 올 때 날씨가 찌푸려 기대 좀 했는데. 여러 날을 가물어 폭염주의보까지 발령된 상황이라 비를 기다렸는데 찌푸렸던 하늘은 이내 개고 말았다. 다시 쏟아지는 폭양.
하승부 마을엔 그래도 가을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옥수숫대는 이미 베어 가리를 쌓았고 군데군데 메밀이 하얗게 꽃이 피었다. 휘휘 둘러봐도 온통 산이다. 짜장 하늘이 손바닥만 하다.
길섶에 잠자리가 어지러이 날고 철늦은 베짱이가 내 머리 위를 가로질러 달개비 수풀에 가 앉는다. 양배추밭에 엎디어 일하는 아낙네가 아니었으면 한번도 사람구경 못했을 뻔 한 외진 산간마을.
굽이굽이 물길을 따라 걷는다. 낙동강의 상류다. 그 물길을 따라 끝까지 가면 낙동강의 수원지라는 태백의 황지에 닿을 것이다.
혼자 가는 여행은 호젓해서 좋지만 반면 지루하기도 하다. 석포까지 12km 정도다. 보통걸음으로 3시간이면 가지만 자꾸만 늘어진다. 날은 덥고 준비해 온 물은 이미 기차간에서 다 마셨다. 땀은 흘러 물신선이 되고, 시장기도 느껴지지만 물이 없으니 그것도 내키지 않는다. 사뭇 물길이어도 그 물을 떠 마실 배짱은 도저히 없다.
민박집이 나타난다. 일단은 물을 얻어 마시고 민박건에 대해 흥정을 해본다. 다음에 다른 이들과 함께 다시 찾을 것이다. 미리 예약문의를 해둔다.
물은 휘휘 흐르고 흐른다. 쏠로 떨어지기도 하고 넓은 소를 파기도 했다. 산천은 여름의 막바지다. 여름꽃이 있고 가을꽃도 있다. 온갖 풀벌레와 나비들이 날아다닌다. 물을 마신 나그네는 그 자연의 축제를 만끽한다.
가도가도 석포는 멀기만 하다. 어림짐작으로도 12km는 훨씬 넘을 것이다. 어쨌든 오늘 안으로는 도착하겠지. 오후의 폭양은 그 절정의 불길을 내리쏟고 있었다.
그리고 석포.
면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거대한 공장이 자리잡았다. 영풍 석포제련소. 엄청난 규모다. 공장을 지나오는 데만 30분 이상이 걸렸다. 다시 또 목이 탄다. 영풍이라면 고상하고 이지적인 영풍문고가 있다. 한 계열사다. 하지만 한쪽은 서울에서도 노른자 같은 자리에 자리잡고 앉아 도시 젊은이들의 지적인 충족감을 채워주는 곳이고, 한쪽은 산 넘고 물 건너 깊은 오지에, 그것도 탄맥이 지나가는 검은 땅 위에, 하루 진종일 불과 사투를 벌이는 노동자들의 고된 삶이 있는 곳이다. 이곳의 노동자들은 카드뮴에 노출되어 살아가고 있다. 이따금 사고가 생겨 생사를 달리하는 노동자가 속출하기도 한다. 최소한의 생활권을 구걸하기 위한 노동자의 시위는 그러나 가진자의 힘 앞에 굴욕하고 만다.
서울의 영풍과 석포의 영풍은 천국과 지옥이다. 세상은 그런 것이다. 극과 극이 공존하는 곳. 양극화를 완화한다고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당찬 포부를 말했지만 그러나 임기가 끝나가는데도 세상은 꿈쩍하지 않았다.
석포는 암울하다.
어쨌든 길고 뜨거운 그 여행이 끝났다. 석포면에서도 교통은 여의치 않았다. 행정구역은 경상북도지만 생활권은 강원도 태백이다. 이곳은 버스도 들어오지 않는다. 하긴 봉화에서 이리로 들어오는 도로조차도 없으니까. 태백에서도 버스를 보내주지 않는다. 거긴 강원도 땅이니까. 외부로 나가려면 자가용이 있거나 아니라면 하루 네 번 왕복하는 기차를 타야한다.
나도 기차를 타고 다시 영주로 돌아간다.
암울한 석포 지역만 빼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근사한 도보여행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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