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장을 만들겠다는 사람들도 그만한 당위성이 있을 테고, 그걸 못하게 하려는 주민들도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젊은이는 없는 촌에 죽을 날만 세고 있는 늙은이들의 정황에 나는 어쩐지 동정이 간다. 그들은 약자다.
이곳은 함양 소로마을이다.
어느날 사업자가 시추장비를 끌고 비탈길을 올라왔다. 마을의 촌로들이 혹은 무밭에 약을 치다가 폭은 정자에 앉아 수박을 먹다가 혹은 냇가에 족대를 겯고 있다가 경운기를 나눠 타고 몰려들었다.
새파란 아들뻘 되는 기술자들에게 달려들어 악다구니를 쏟아낸다. 시추기계는 시동도 틀어보지 못하고 한나절을 버티고 있다가 다 저녁에야 겸연쩍게 내려간다.
일단은 주민들의 승리처럼 보이지만 결국 골프장은 들어서고 말 것이 눈에 선히 보인다.
그러던 어느날 자정이 지나서 수상한 엔진소리가 들렸다.
다들 잠든 깊은 밤중에 시추기계가 기습해 온 것이다. 정말 누구도 예상 못한 야습이었다.
나는 경악했다. 그들은 엄연한 강자다. 결국은 그들의 승리로 돌아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들 깊은 잠에 빠진 야심한 시간에 습격을 해오는 치졸한 비겁함에 분노했다.
허나 어쩌겠는가. 나의 분노는 그저 분노로만 끝나 버린다. 저들에게 나 또한 약자인 것이다. 더구나 나는 마을주민도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기계는 그야말로 도둑고양이처럼 일을 시작했다.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을 사업관계자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확성기에서 요란하게 사이렌소리가 울리더니 곧 도둑고양이의 기습을 알리는 방송이 마을 전역에 퍼져나갔다.
마을은 삽시간에 깨어나고 포터와 경운기소리가 비탈길을 올라왔다. 늙은이들의 악다구니소리와 함께 시추기계의 작동도 멈췄다. 도둑고양이의 실패다.
날이 새도록 늙은이들은 진을 치고 앉아 이슬을 맞았다.
날이 밝은 후 보니 과연 젊은이는 없다.
오전 내내 힘겨루기를 하고나서 시추기계는 또다시 겸연쩍게 내려갔다.
역시 노인들의 승리로 보이지만 언젠가는 그 길을 내줄 수 밖에 없음을 노인들 자신도 알고 있다.
그들은 강자다. 가진 자요 폭군이다.
몇 날이고 진을 치고 대치하다보면 지쳐 쓰러지는 건 분명 노인들이다. 수확철이다. 농약도 쳐야 되고 고구마도 캐야 한다. 그래야 먹고 사는 것이다. 날마다 기계가 올라와서 대치하다 보면 결국은 농민이, 아니 노인들이, 아니 가지지 못한 자가 지고 마는 것이다. 그냥 첨부터 승부는 정해져 있는 게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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