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숲에서

비둘기, 숲에서 날아오른다

설리숲 2007. 5. 31. 03:00

 

  여행을 해 본적이 있는가. 낯선 이방의 역 광장에 서서 떼를 지어 역사(驛舍) 지붕 위로 어지러이 날아오르는 비둘기를 본 적이 있는가. 역 광장의 비둘기는 나그네로 하여금 짙은 여수(旅愁)를 느끼게 한다. 영화에서 보는 동유럽의 어느 광장에 선듯한 이국정취를 물씬 풍긴다.

 

  나는 비둘기를 좋아한다. 사람들이 던져 주거나 먹다 흘린 먹이에 길들여진 도시의 나태하고 비대한 비둘기가 아닌 진짜 비둘기 말이다.

  외진 산골에 들어와서 비탈밭에 콩을 뿌렸더니 가을이 깊어지면서 이게 제법 오달지게 여물어 가고 있다.

 한데 이 비둘기가 극성이다. 워낙 적요한 산골이라 방안에 앉아 있자면 온갖 새들의 날갯짓소리가 들려 온다. 그 중에는 푸드득퍼득, 비둘기임에 틀림없는 소리도 들리곤 하는데 분명 내 콩을 노리고 날아드는 것이다.

 처음엔 얼른 뛰어나가 훠이훠이 쫓기도 했다. 그러나 불가항력으로 제물에 지쳐 이젠 나가 보지도 않는다. 실컷 먹으라지, 설마 내 것까지 죄다 먹어 치우지는 않을 테지.

 녀석들이 얄밉긴 해도 풀쳐 생각해 보면 한편 기특하고 대견하기도 한 것이다.

 진짜 비둘기다. 도시의 비둘기와 구분지어서 흔히 산비둘기라고 하는 진짜 비둘기인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아름다운 비둘기, 아니 비둘기소리를 어른이 되고 나서도 무척이나 무서워 했었다. 유년시절의 기억 하나가 오랫동안 내 감각을 그렇게 지배해 왔던 것 같다.

 그때도 우리는 깊은 산골마을에 살았다. 내가 대여섯 살 때의 기억이다. 어른들은 들판에 나가고 누나들은 호미와 자루를 들고 집을 나섰다. 고구마를 캐러 가는 것이다. 어린 꼬마였던 나는 기를 쓰고 누나들을 못 따라다녀 안달을 하던 녀석이라 옳거니 하면서 먼저 앞서 길을 나서곤 했다.

 집 뒤 함박골 골짜기를 두어 마장 정도 오르면 거기 비탈에 숲으로 둘러싸인 우리 고구마밭이 있었다. 누나들은 머위 잎으로 모자를 만들어 쓰고는 뜨거운 지열이 훅훅 올라오는 밭에 엎드려 고구마를 캤다. 누나들이 고구마를 캐는 동안 나는 혼자 밭 언저리를 어정거리며 심심해 했다.

 그럴 때 가까이서 들려 오는 무서운 소리. 비둘기였다. 구구우 하는 바둘기 특유의 소리가 들리면 나는 머리가 쭈뼛해졌다.

 밭 한쪽 귀퉁이에 무덤 하나가 있었다. 무덤이란 게 죽은 사람이 누워 있는 것이니 어린아이들에게는 늘 공포의 대상이었다. 후미진 곳에서 무덤을 하나 만나면 금방 시체가 벌떡 일어나 나올 것 같은 무섬이 일어 오줌을 지리기도 하면서 냅다 달아나곤 하곤 우리들이었다.

 그러니 밭 언저리에서 혼자 어정거릴 때도 사실은 내 눈은 줄곧 그쪽만 흘끔거렸고, 신경 또한 오로지 그쪽에만 가 있었기 때문에 무료함을 느낄 여유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 차에 구구우 하고 들려 오는 비둘기 울음소리는 꼭 그 무덤 속에서 나는 것 같아 나는 그만 오싹 수꿀해지는 것이었다.

 

  그 후로 산에 들어갔다가도 비둘기의 울음소리만 들리면 영락없이 무섬을 느끼며 얼른 되돌아 나오곤 했는데 어리석게도 꽤 나이를 먹을 때까지도 그 공포는 벗질 못했었다.

 그러다가 자연과 산이 좋아 다시 산속으로 들어가 살고픈 바람이 생길 무렵에야 그 무섬을 떼 버릴 수 있었는데 그때가 대략 서른 살쯤이었던 것 같다.

 이 비둘기가 살고 있는 곳은 참말 깊숙하고 청정한 곳이다.

 산이 좋아 늘 산을 찾던 나는 으늑한 산 가까이로 다가갈 때 느끼는 겁기와 함께, 그 깊은 숲에서 만나는 비둘기소리를 들을 때 얼마나 사무치게 대견하고 가슴 뿌듯한지 모른다.

 

  이제 나는 그 비둘기가 사는 산속에 들어왔고, 가까운 숲정이에서 구구대는 소리와 함께 푸드득 소나무 숲을 날아오르는, 싱둥하고 미추름한 그 칼깃을 보며 혼자 찐더워 하고 있다.

 비둘기를 보는 내 마음이 이럴진대, 설사 녀석들이 내 콩을 먹은들 그리 아까울 건 없다. 도시에서는 일부러 먹이를 뿌려 주거늘, 제가 알아서 먹고 가니 그것 또한 대견스러운 것이다.

 녀석들이 먹어 봐야 얼마나 먹겠는가. 공짜로 먹는 것도 아니다. 대신 녀석들은 질펀하게 똥을 갈겨 놓고 가니 나는 힘 하나 안들이고 거름을 준 게 되는 것이다.

 이곳은 지금 비둘기가 지천이다. 오늘도 나는 콩밭으로 간다.

 아름다운 나의 비둘기를 보러.

 

 

 

                                         20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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