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숲에서

숲의 향기

설리숲 2007. 6. 10. 17:58

  

 바람 불고 비 오고 우박까지 한 이틀 날이 궂더니 오늘은 햇살 가득...

 비 맞은 수목이 한층 푸르다.

 아침부터 뜨겁다. 본격적인 여름으로 들어가나 보다.

 

 숲으로 들어간다.

 숲은 내게 많은 것을 준다.

 맑은 공기, 편안한 휴식, 짙푸른 초록, 가벼운 운동,

 무엇보다도 풍성한 먹을거리가 있다.

 괭이를 메고 톺아 다니니 금새 더덕이 눈에 들어온다.

 한 뿌리를 캐자마자 숲에 그 향기가 퍼진다.

 더덕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한 뿌리를 발견하면 그 인근에서 여러 뿌리를 캘 수 있다. 산삼도 마찬가지다.

 어느 새 내 두어 끼 양식이 된다.

 가는 놈 하나를 까서 씹는다. 입안에 퍼지는 매콤한 향....

 

     

 

 

 여름,

 숲은 온통 수풀과 넝쿨로 우거져 발길 옮기기가 만만치 않다.

 환경이 어쩌니 해도 아직은 깊고 그윽한 숲으로 남아 있다.

 온갖 생명이 가득하다. 다들 어우러져 질서 있게 살아간다.

 생경한 건 오로지 나, 즉 인간이다.

 이 자연에서 반드시 없어져야 할 건 사람이라고...

 그러나 어쩌냐. 나하나 사라진들 그 수많은 인간군락은... 

 

 

     숲은 우거져 길을 잃을 것 같다

 

 사라져야 할 인간 중 하나 그래도 숲이 좋아 숲을 즐기고 싶어.

 이곳에 들면 멍하니 아무 생각도 없어진다.

 

 

 

 숲밖엔 오늘도 요란하리라.

 6월이다.

 해마다 6월이면 함성이 들린다고들 한다. 월드컵도 그렇고...

 6월 10일,

 온 거리로 쏟아져 나와 군부독재를 몰아내려 갈가리 찢기던 그 6월이다.

 꼭 20년 전, 그때 나는 어디에 있었나.

 인천의 어느 공장에서 숟가락에 광을 내고 있었다. 그해는 또 들불처럼 노사분규가 세상을 휩쓸고 있었다. 민주화투쟁에 빌붙어 역병처럼 우리 공장도 파업에 들어가 있었다.

 참으로 뒤숭숭하던 시절이었다.

 공장 앞 막걸리집에서 먹지도 못하는 술을 꿀럭꿀럭 털어 넣다가 누군가의 제의로 연안부두로 향했다.

 송림동 교차로 부근에서 오도가도 못하고 서 버린 버스.

 그때 보았다. 거리를 가득 메운 인파들... 전두환 노태우 물러가라! 호헌철폐!

 분노는 분노를 불러 모으고, 열정은 열정을 당겼다.

 내가 민주화를 원했던가. 난 그저 일개 금속노동자였다. 내게는 개헌이 아닌 수당인상이 절실했다. 그들이 온몸을 던져 구국의 불을 지필 때 난 그곳 어느 골목길에 쭈그리고 앉아 왝왝 속엣 것을 게워내고 있었다.

 자신의 몸을 던져 투쟁한 그들의 희생은 헛되지 않아 세월이 지난 지금 많은 것이 변했다. 수구세력과 그 떨거지 언론으로부터 반골(?)이라 매도당하던 노무현 같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 그런 세상이 된 것이다.

 어쨌건 그런 거다. 내가 민주화와는 아무런 연관 없이 골목길에 쭈그려 앉아 토악질을 했어도

 세상은, 바람은, 물결은

 그렇게들 흐르고 휘몰아쳐 변하고 마는 것이다. 결국은 그렇게 되는 거다.

 

 다 무슨 소용이랴.

 초록이 무성한 이 숲에 들어오면 그런 것 죄다 부질없어.

20주년이라고 머리띠 두르고 피켓 들고 고래고래 외쳐들 봐야 오늘 밤만 자고 나면 그저 그뿐인 걸. 그저 허망할 걸.

 말없는 이 숲은 그러나 깃들어 사는 온갖 생명들이 스스로 조화와 질서를 지키며 세상을 즐긴다.

 

                

 

                

                    잎새 뒤에 숨어숨어...

                         딸기 철이다. 매년 빨간 산딸기를 따다 술을 담갔는데...

                    한동안 붉은 딸기가 온 골짜기를 물들일 거다

 

 

 밖에서 무슨 지랄들을 해쌌든,

 초록의 숲은 그저 우거지고 깊어진다.

 말없이 여름은 깊어가고 있다.

 

 나도 그렇게 흘러가고 싶다.

 

      

 

           

              이 정도면 서너 끼 양식은 좋이 된다

            무쳐 먹을까 구워 먹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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