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나 호박 따위 덩굴작물들을 키울 때 맨 처음 열리는 꽃다지를 따 주면 풍성한 열매를 거둘 수 있다. 본능적으로 위기의식을 느낀 식물이 오로지 자손번식의 일념으로 열매를 많이 맺는 것이다.
종족 번식의 본능은 사람도 역시 강하다. 교수형을 당한 사람은 성기가 팽팽하게 발기해 있다고 한다. 그 최후의 순간에 느끼는 자손번식에 대한 본능 때문이라 한다. 물론 들어서만 알지 내 직접 본 바 없으므로 음 그래? 혹은 그럴 수도 있겠다 정도로만 그쳤는데,
이태 전 어느 노인의 피살현장에서 나는 짜장 그걸 보았다. 옹은 밧줄로 교살되었다. 아직도 따듯한 온기의 시신을 내 손으로 옷을 벗겨 수시하고 수의를 입히고......
그때 나는 보았던 것이다. 커다랗게 발기한 그것을. 옹의 나이 칠십이 훨씬 넘어 있었다. 여전히 새벽이면 발기해서 성가시기도 한 새파란 나의 그것보다 훨씬 우람하던 그것. 멱의 시퍼런 살흔보다도 나는 옹의 기세 좋던 그것에 충격을 받았었다.
아름답다? 망자에게 이런 표현은 무엄하고 무례하지만 아무튼 숭고하고 장엄하고 그런 비스므리한 것을 느꼈었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
십장생 중의 한 장생인 소나무.
우리 고건축 재목으로서 가장 질 좋고 고급한 게 소나무다. 소나무 중에서도 늙은 소나무라야 한다. 젊은 나무는 기운차게 위로만 솟는다. 그러다가 나이가 차면 힘이 떨어져 가지가 처지고 그때부턴 몸피가 굵어진다.
유능한 도편수는 집을 짓기 전에 오랜 시간을 숲을 헤매어 나무를 찾는다. 가지가 처지고 몸피가 굵은 황금소나무를 발견했을 때의 기쁨은 도편수 아닌 사람은 알지 못한다.
그에게 발견된 늙은 소나무 또한 행운이다. 기나긴 세월을 비바람에 이아쳐 살다가 죽음을 앞둔 소나무는 베어져 궁궐이나 사찰의 재목이 되어 다시 천년을 사는 것이다.
이 말없는 천년의 생물에게도 역시 종족번식의 본능이 있다. 죽음에 이른 나무는 엄청나게 많은 솔방울을 단다. 스스로 자신의 죽음을 아는 것이다.
오 년 전 함양의 어느 숲속에서 다다귀다다귀 많은 솔방울을 달고 있는 소나무를 보았다. 가지는 척척 휘고 보굿은 거북등처럼 기운차게 갈라져 있었는데 어섯눈도 못 뜬 나는 저 욕심 많은 나무가 제 능력을 모르고 무식하게 열매만 많이 달았다고 시퉁머리스럽게 시건방을 떨었었다.
뒤늦게 소나무의 비밀을 알고 나서 느꼈던 부끄러움.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의 장구한 소나무는 저리 묵묵한데 기껏 백년도 못 사는 사람 나부랭이가 무얼 안다고 깝죽대는가. 스스로 죽음을 알아 나무는 저리 준비를 하고 있는걸. 사람이야 제 죽음을 어이 알리.
겨울숲의 울창한 나무들을 보면서 자꾸만 울렁증이 이는 요즘이다. 사람의 현재의 수명은 긴 건가 짧은 건가. 그 생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왜 우리는 침묵을 견디지 못할까. 죽음이 가까이 오는 것을 알 수는 없나. 알 수 있다면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
오만 가지 상념들이 작은 대갈통 안에서 귀살스럽게 지랄발광을 해댄다.
아울러 카푸스 님과 김천 직지사의 송백숲 아래에서 함께 거닐며 숱한 이야기를 나눴던 어느 여름날의 편린도 암암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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