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햇빛 속으로

내 이름

설리숲 2008. 3. 29. 22:41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 이름은 ‘재순’이다. 딸이라서 재수가 없다고 그랬단다. 큰외삼촌이 맏이니 아들을 먼저 하나 놓았으면서도 딸이라 재수가 없다고.

 이모는 또 낳았다고 ‘또순’이다. 출생신고를 할 때는 한자여야 하니까 호적에는 ‘황도순(黃道順)’이라 등록했다.

 자고로 여자아이가 나오면 벌레 씹은 표정이었지. 그건 자식도 아니었다. 그러니 이름 하나 제대로 지어주질 않았다. 그래도 호적엔 올려야 하니 면에 가서 신고는 하는데, 면서기가 이름을 물으면 그때서야 생각나는 대로 짓곤 했다.

 갓난 애여서 간난이로 불렀고 그건 ‘김간난(金間蘭)’이요, 큰년이는 ‘김대순(金大順)’이다. 심지어는 변소에서 낳았다고 똥녀라고 했는데 그건 ‘김분례’가 됐다. 방영웅의 소설 <분례기>의 주인공도 아마 그럴걸.



 

    이름이야 아무려면 어때 삼순이만 아니면 됐지


  우리가 가진 이름이란 건 우리의 의사와는 하등 별개다. 이름이 맘에 안 들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 부모가 지어준 그 이름이 죽을  때까지 내 간판이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 이름이 평생 부끄러움이 되기도 한다. 특히 여자에게는.

 난 아무라 생각해도 이상한(?) 이름을 지어주는 부모의 속내를 알 수가 없다. 아무리 뜻이 좋기로서니 부르기 민망한 이름을 지어 줄 수가 있담.

 조선 초의 김자지(金自知), 성종 때 조자지(趙自知), 숙종 때의  왕자지(王字之), 명종 때의 신보지(申寶至), 세종 때의 이보지(李寶之), 고려 공민왕 때의 장보지(張補之) 등등 함부로 부르기 어려운 이름들을 가진 인물들이 많다.


 그 뜻이야 모두 좋아서 그런지 다들 입신양명해서 이름을 남기긴 했다만 그래도 그렇지. 저 이름으로는 짜장 평생을 부끄러워하며 살기 딱 알맞다. 요즘에야 개명도 가능하지만 그것도 극히 어려운 상황이고 보면.



 요즘엔 닉네임이 각광을 받고 있다. 본명이야 싫어도 낙인처럼 지니고 살아야 하니 치워두고,

 그래서 닉네임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이름으로,

 의미가 있고,

 이미지도 염두에 두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대변하는 단어를 골라 짓게 마련이니

 어쩌면 부모가 지어준 이름보다도 그 사람에겐 더 중요하고 긴요한 것일 것이다.


 퇴계니 율곡이니 예전에 이름 대신 호를 불렀듯이 이젠 닉네임이 호를 대신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대신 딱딱하고 엄중한 호가 아니라 자유분방하고 산뜻한 호로서 이름을 대신할 수 있겠다.


 수천만의 네티즌이 제각각 이름이 있으니 닉네임 하나 짓는 것도 참 어렵다. 단어는 한정되어 있으니 중복되는 이름도 부지기수일 것이다.

 애칭이라지만 본명보다도 닉이 더 많이 쓰이는 세태니 함부로 또는 장난스레 지을 일이 아닌 것 같다. 그것이 자신의 얼굴이요 간판이니까. 남이 불러주는 이름대로 운명이 따라간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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