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햇빛 속으로

검은 바다 전설

설리숲 2022. 11. 1. 18:29

                                             

 내륙의 산골은 그 아침에도 싸늘했다. 약속시간을 한 시간이나 늦춰야 되게 늦잠을 잤는데 그제도 마당에 하얀 서리가 덮여 있었다.

 그의 얼굴을 오랜만에 본다. 늘 가까이 있는 느낌이지만 실상 1년만이다.

 묵호항...

 오들오들 떨 정도로 추운 산골의 아침과는 확연히 다르게 따뜻하다.

 잔잔한 바다.

 고요한 바다.

 

 항구에 가면 사람의 냄새가 난다. 비릿한 생선냄새가 아닌 활기차고 부산한 삶에의 의지로 가득한 인간 냄새. 아직은 새벽어둠이 푸르스름할 때 거친 파도와의 비장한 게임을 마친 고깃배들이 돌아오면 선창과 어판장은 이미 생활의 가장 중심에 들어 왁자지껄 부나하다.

 아침놀을 날개에 얹은 갈매기떼 어지러이 날고 몇 놈은 밤새 일한 어부보다 제가 더 고단한 척 배의 이물에 앉아 있다. 

 바다는 그렇다. 더구나 항구는 고달프면서도 애틋한 그런 곳이다.

 시간이 꽤 지나 점심때가 다 되었는데 어판장은 여전히 사람들의 억센 움직임이 넘실거린다.

 방파제 해안을 둘이서 걷는다. 멀리 방파제 끝에 빨간 등대가 섰다. 난 세상의 등대가 다 빨간색이었으면 좋겠다.

 

 - 동해에 가면 곰칫국이 맛있어요

 

 아닌 게 아니라 우리가 걷는 연도에 죽 늘어선 식당들에 곰칫국이라는 메뉴가 지천이다. 적당한 집을 골라 마주앉는다. 아침을 못 먹어 허줄하다. 흐물흐물 촉감이 세련되지 못한 그놈의 살을 발라 먹는다.

 술 한 잔 했으면 딱 좋겠는데,

 통유리 창 밖에는 검푸른 바다가 시시각각 그 색이 변하고 있고, 구름 없는 파란 하늘에 갈매기들은 유유히 떠다니고, 마주앉은 사람은 늘 보고프던 그 사람이다. 술 한잔 하기 딱 좋은 밑그림이다.

 그렇지만 낮술은 참으세요. 저녁도 있으니.

 

 바다에서 급히 치달은 높은 언덕 위에 새하얀 등대가 있다. 동해시에서 관광명소로 지정하여 공개한지 며칠 안됐다는 그의 말.

 어지러이 나선계단을 걸어 등대로 오른다. 드넓게 펼쳐진 검은 바다. 스크린처럼 우리 얼굴 가까이로 불쑥 다가온다.

 나의 동해 방문의 절정이다.

 막막해.

 여기서 이대로 떨어져 죽을 수 있을까. 절경이 뛰어난 곳은 늘 나에게 죽음의 유혹을 하곤 한다. 내가 더 살아야 할 의미가 있나. 별로 없다. 그렇담 지금 여기서 죽는 의미는? 없다. 죽을 의미가 없으니 그럼 죽지 말자. 동행한 그가 너무 예쁘다.

 그렇다. 내가 죽지 않는 건 그가 예쁘기 때문이다.

 

 눈부신 햇살이 가득 쏟아지던 묵호 앞바다는 저녁 때를 지나 밤 깊도록 거기에 고요하게 잠자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오후에는 바람이 불어 파도를 일으켰는지도 몰라. 하지만 그러기 전에 우린 그곳을 떠나왔고 내 눈과 가슴엔 그 후로도 오래 잔잔한 검은 바다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숱한 이야기들...

 이제는 끝나 버린, 끝났거나 희미하게 퇴색해서 이미 포기했을지도 모르는 청춘의 기쁨과 슬픔을 되살리는 해후...

 그날의 어설픈 회한들을 바다와 함게 오래 가슴에 묻어둘 것이다.

 

 아름다운 회상은 전설이 되기도 한다. 

 

 

                

 

 연인이 아니면서도 연인처럼 지낼 수 있을까.

 혹은 연인이면서도 연인이 아닌 것처럼 지낼 수도 있나.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도 다른 사람과 키스를 할 수 있을까.

 혹은 다른 사람과 키스를 하면서도 애인을 사랑한다 할 수 있나.

 

 별을 본다.

 그와 헤어져 건널목을 건널 때 파란 신호등 뒤편 저 멀리 성근 별들이 보인다.

 내게 올인 하지 말고 삼십 프로만 할애하라고.

 내게 모든 것을 쏟았다가 잘못되면 당신의 모든 것을 잃는다, 너무 허무할 거라고 예전 여인에게 그랬었다.

 친구로 지낸다면 그게 가능하지 않겠나.

 너무 가까워지면 여자는 더럭 겁이 나나 봐. 남자는 욕심이 많아. 발목을 보면 종아리가 보고 싶고, 허벅지를 보고 나면 더 은밀한 곳이 궁금하고... 단순히 남자들의 본능이요 속성이라 치부하고 말 일인가.

 

 별은 청량하지 못한 도시의 하늘에서도 반짝거린다.

 그 아래 사람들이야 무슨 상관이랴. 저들은 저들 나름대로 역할만 하고 있을 뿐.

 그저 미천한 인간들만이 사랑에 속고 이별에 울고 저 혼자 온갖 고뇌 다 짊어진 듯이 앓고 병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숱한 이야기들...

 우리의 회상이 그냥 의미없는 회상으로만 남겠는가.

 전설이 되거나 꿈같은 현실이 되거나...

 

 해안의 도시에 밤이 깊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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