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이라지만
내 유년의 고향 산골은 봄꽃이 별로 없었습니다.
진달래는 지천이었고 산내들에 개복숭아 꽃이 흔했고 뉘집 울안에 호리호리하게 선 배나무의 하얀 꽃, 써레질 끝난 무논을 날아다니며 제비들이 한창 집들을 지을 무렵 뒤꼍의 앵두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정도였습니다.
툇마루에 앉아 하얀 앵두꽃잎이 사르르 흩날리는 걸 보다가 졸음에 겨워 사르르르 잠드는 귓결에 개울 건너 논에서 소를 부리는 아버지의 메나리소리가 들렸습니다.
버찌 이야기를 알긴 했지만 어떻게 생긴 건지 보질 못했고 그 꽃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촌사람들도 간혹 이야기를 할 정도로 창경원 벚꽃은 너무도 유명해서 살아생전 한번 꼭 보고 싶어하던, 시골사람들의 일종의 버킷리스트였습니다.
일생을 향촌에서 한번도 벗어나 보지 못하고 마는 것이 사람의 일생이니 서울 가는 것도, 더구나 창경원은 먼 나라 이야기였습니다.
내가 나중에 커서 창경원 놀러가는 게 가능해졌을 때는 동물원도 벚꽃도 이미 사라져 버렸습니다.
창경원 벚꽃은 가슴 속에만 영원한 동경으로 남아 있습니다.
여기는 영주입니다.
어릴 때는 그렇게도 귀했던 벚나무가 이젠 어딜 가나 지천입니다.
예전 플라타너스가 주종이던 가로수도 언젠가부터 이 벚나무들이 주종이 됐습니다.
한국사람들이 유난히 벚꽃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한 송이씩 터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피어나는 하양 벚꽃의 향연이 시작됐습니다.
영주 서천변을 따라 약 4km 정도 길게 터널을 이루고 있습니다.
지금도 벚나무 식재작업이 진행중이며 내 짐작으로는 아마 무섬마을까지 벚나무길이 이어질 듯 합니다.
이곳 벚나무는 꽃송이가 매우 작아 매화만 합니다.
손톱만큼 한 크기라 왕벚꽃만큼 화려하진 않지만 그 나름의 앙증맞은 매력이 있습니다.
지난 토요일 수원 황구지천의 황량했던 벚나무길을 보고 온 다음 날입니다. 이렇게도 차이가 있다니요.
사람이 엄청 많아요.
나는 이 터널 진 벚나무길을 좋아합니다.
하양 꽃과 사람과 봄이 함께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풍경입니다.
수인선 협궤열차도 이야기만 듣고 언젠가 한번 타 봐야지 하다가 정작 그러려고 했을 때는 그 기차도 사라져 버려 그것 역시 마음 속의 로망으로만 남아 있습니다.
사람이 원하는 걸 모든 걸 이루고 살 수는 없으니 소중한 로망으로 간직하고 있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떠난 첫사랑이 평생 아련하고 애틋하듯이.
플라타너스가 주종이었던 한국의 가로수가 지금은 벚나무가 주종이 됐듯이 차츰 세월이 가면 다른 매력 있는 나무들로 또 바뀔지도 모르겠습니다.
구닥다리 수인선협궤열차 대신 최신식의 수인선분당 전철이 편리하듯이,
사라지는 것을 아쉬워하지 않고 그냥 지금 보이는 것을 즐기는, 일종의 체념 혹은 달관도 괜찮은 처세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옛 완행 비둘기열차를 그리워하지만 막상 그게 다시 생기면 안 탈 거예요.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아름답게 추억하고
지금은 계절의 하양연화, 내 인생의 화양연화를 즐길 때입니다.
영화 <화양연화> 테마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