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햇빛 속으로

복사꽃 필 무렵

설리숲 2022. 4. 19. 18:39

 

  전쟁에 패한 장수가 낙향해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

   마지막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는 꽃

 

   복사밭 건너

   논에 물이 들어가고 있었다.

 

                    이산하 <복사꽃>

 

 

 

 

서양의 이상향은 유토피아,

동양은 무릉도원(武陵桃源).

복사꽃 만발한 선계 같은 곳이다.

 

가장 아름답다는 꽃중의 꽃 복사꽃.

삼국지에서도 가장 상징적이고 핵심적인 도원결의.

 

 

내 유년시절에도 시냇가나 산기스락, 밭두둑 언저리 등에 아무렇게나 서 있던 개복숭아나무에 분홍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철이면 어린 심정에도 ‘아름다운 세상’의 한 순간을 느끼곤 했다.

 

 

예로부터 집안이나 우물가에 복숭아나무 심는 것을 금기했다고 하는데 귀신을 쫓는다는 부적의 영물이라서가 아니라 그 꽃의 아름다움에 부녀자들이 바람나는 걸 단속하라는 의미라고 한다.

 

앵두나무 우물가의 동네처녀도 바람이 나거늘 복사꽃이면 오죽하랴.

 

 

 

 

 

 

아무튼 내가 좋아하는 꽃은 따로 있지만 복사꽃의 미태는 과연 꽃중의 꽃이라는 걸 수긍한다.

 

10여년 전에 영덕 여행길에 우연히 길을 잘못 찾아들었다가 그야말로 무릉도원 같은 풍광을 만나고 넋이 빠진 적이 있었다. 동네 전체가 환한 분홍 일색이었다. 국민학교 국어책에 나오던 고향마을의 전형적인 그림이었다. 여러 장 사진도 찍었었다.

나중에 지도를 보고 그곳이 지품면 삼화리라는 걸 알았다.

 

 

근래 인터넷에 실린 그곳 기사를 보고는 서슴하지 않고 달려갔다.

지품면을 흐르는 오십천변의 농가 밭들은 거개가 복숭아다.

지금 꽃이 절정으로 피어나고 있었다.

 

 

 

 

 

 

 

그런데 예전 보았던 아름다운 무릉도원은 아니다.

그때보다도 복숭아밭들은 훨씬 더 많아졌는데 과일을 생산하기 위한 농사인지라 과수원에는 각종 철골 등 각종 구조물들이 삑삑했다.

서운하지만 불만할 것도 아니다. 사람들 눈요기하라고 복숭아나무를 심은 건 아니다. 농부들은 하나라도 더 복숭아를 따서 파는 게 생업이다.

 

그 때문에 원시적인 복사꽃 풍경은 아예 없다.

국어책 속의 그런 정겨운 그림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복숭아밭 뿐 아니라 배나무 과수원도 마찬가지다. 원래 배나무는 키 큰 교목이지만 농가에서는 키를 못 크게 강제하고 옆으로 휘게 만들었다. 영 멋스럽지 아니하다.

이화에 월백하고 운운,

하얀 이화 그늘 아래서 밀어를 속삭이던 처녀총각의 춘심은 이제 옛 문학 속에만 박제처럼 남게 되었다.

 

 

아쉽지만 그게 세월이고 시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맛난 복숭아나 배를 먹을 수 없다.

 

 

 

 

 

 

 

 

 

 

 

 

 

 

 

 

 

 

10여 년 전의 사진은 정다웠지만 지금의 복사꽃 사진은 정겹지 못하다.

어설프게 편집을 하고 보정도 하고.

 

그래도 멋이 없다.

그게 세월이고 시류려니 너그러운 척 혼자 안분지족이다.

 

 

 

아무려나 곱든 아니든 지금 삼화리 일대는 복사꽃 천지다.

참 아름다운 계절이다.

복사꽃 우듬지 위 창공으로 봄날의 음표들이 날리는 것 같은.

 

 

 

 

         슈베르트 : 세레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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