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에 패한 장수가 낙향해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
마지막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는 꽃
복사밭 건너
논에 물이 들어가고 있었다.
이산하 <복사꽃>
서양의 이상향은 유토피아,
동양은 무릉도원(武陵桃源).
복사꽃 만발한 선계 같은 곳이다.
가장 아름답다는 꽃중의 꽃 복사꽃.
삼국지에서도 가장 상징적이고 핵심적인 도원결의.
내 유년시절에도 시냇가나 산기스락, 밭두둑 언저리 등에 아무렇게나 서 있던 개복숭아나무에 분홍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철이면 어린 심정에도 ‘아름다운 세상’의 한 순간을 느끼곤 했다.
예로부터 집안이나 우물가에 복숭아나무 심는 것을 금기했다고 하는데 귀신을 쫓는다는 부적의 영물이라서가 아니라 그 꽃의 아름다움에 부녀자들이 바람나는 걸 단속하라는 의미라고 한다.
앵두나무 우물가의 동네처녀도 바람이 나거늘 복사꽃이면 오죽하랴.
아무튼 내가 좋아하는 꽃은 따로 있지만 복사꽃의 미태는 과연 꽃중의 꽃이라는 걸 수긍한다.
10여년 전에 영덕 여행길에 우연히 길을 잘못 찾아들었다가 그야말로 무릉도원 같은 풍광을 만나고 넋이 빠진 적이 있었다. 동네 전체가 환한 분홍 일색이었다. 국민학교 국어책에 나오던 고향마을의 전형적인 그림이었다. 여러 장 사진도 찍었었다.
나중에 지도를 보고 그곳이 지품면 삼화리라는 걸 알았다.
근래 인터넷에 실린 그곳 기사를 보고는 서슴하지 않고 달려갔다.
지품면을 흐르는 오십천변의 농가 밭들은 거개가 복숭아다.
지금 꽃이 절정으로 피어나고 있었다.
그런데 예전 보았던 아름다운 무릉도원은 아니다.
그때보다도 복숭아밭들은 훨씬 더 많아졌는데 과일을 생산하기 위한 농사인지라 과수원에는 각종 철골 등 각종 구조물들이 삑삑했다.
서운하지만 불만할 것도 아니다. 사람들 눈요기하라고 복숭아나무를 심은 건 아니다. 농부들은 하나라도 더 복숭아를 따서 파는 게 생업이다.
그 때문에 원시적인 복사꽃 풍경은 아예 없다.
국어책 속의 그런 정겨운 그림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복숭아밭 뿐 아니라 배나무 과수원도 마찬가지다. 원래 배나무는 키 큰 교목이지만 농가에서는 키를 못 크게 강제하고 옆으로 휘게 만들었다. 영 멋스럽지 아니하다.
이화에 월백하고 운운,
하얀 이화 그늘 아래서 밀어를 속삭이던 처녀총각의 춘심은 이제 옛 문학 속에만 박제처럼 남게 되었다.
아쉽지만 그게 세월이고 시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맛난 복숭아나 배를 먹을 수 없다.
10여 년 전의 사진은 정다웠지만 지금의 복사꽃 사진은 정겹지 못하다.
어설프게 편집을 하고 보정도 하고.
그래도 멋이 없다.
그게 세월이고 시류려니 너그러운 척 혼자 안분지족이다.
아무려나 곱든 아니든 지금 삼화리 일대는 복사꽃 천지다.
참 아름다운 계절이다.
복사꽃 우듬지 위 창공으로 봄날의 음표들이 날리는 것 같은.
슈베르트 : 세레나데
'서늘한 숲 > 햇빛 속으로' 카테고리의 다른 글
22년 봄 흙사랑 워크숍 (0) | 2022.04.27 |
---|---|
달성 비슬산의 진달래 (0) | 2022.04.25 |
대구 이월드 벚꽃이 절정 (0) | 2022.04.04 |
광주호의 여름 (0) | 2022.03.29 |
공곶이 노란꽃 수선화 (0) | 2022.03.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