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도 폐하고 차례를 없애고 나니 갈 데가 없어 심심하기도 하겠다.
작은형이 추석 때 괴산엘 온다고 미리 전화를 했다. 족대로 고기 잡고 매운탕도 끓여먹을 거라며 좋은데 있냐고 물어왔다. 고기잡이는 관심이 없기에 괴산에 살아도 그런 것에 무신경하다. 내 삶의 지표중 하나가 생명, 즉 인간 말고도 다른 뭇 생명들에 대한 존중이라 우리나라 사람들 취미 첫 번째라는 낚시에 대해 아주 부정적이다. 그래서 형의 전화가 마음에 썩 내키진 않았지만 표출할 수는 없고, 너그럽게 생각하면 형의 그 재미를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어서 그러자고 했다.
형제간이이어도 띠동갑이나 터울이 져서 여느 사람들처럼 애틋한 형제간의 정의는 약한 편이다. 내가 태어났을 때 형은 이미 청소년기여서 또래들과 산에 들어가 나뭇짐을 해오고 동네 닭서리나 냇가에서 고기 잡아 천렵을 하던 세대였고 곧이어 도시로 나가 취직을 했고 내가 자라면서는 군에 가 있었다, 제대를 하고는 회사에 다니면서 한동안 집에 있었지만 장가를 들면서 분가를 해 또다시 멀리 떨어져 이제껏 살아오고 있는 터다.
늙어 가면서 몸도 마음도 건강이 예전만 못하니 측은하기도 하다. 소싯적에는 요즘의 ‘꽃미남’이라는 칭찬이 자자할 정도로 빼어난 미모로 집에 데려온 여자들도 여럿 있을 정도여서 인물로는 별로 내세울 것 없는 우리 집안에 돌연변이 같은 존재였다. 형수도 실은 형의 외모에 혹해서 적극적으로 달라붙은 케이스다. 그랬는데 나이 들면서 몸도 아프고 약해지니 젊은 날의 화려함은 모두 스러지고 그제서는 형수의 구박에 그냥저냥 숙어 산 지 오래다.
매운탕이 먹고 싶어서겠나. 그저 시골서 놀던 옛 추억이 그리워서겠지. 생명의 귀중함도 중요하지만 형의 그 향수도 소중하니 그거 하나 맞춰주지 못할까. 냇물에 들어가 돌과 수초를 뒤지며 피라미나 갈겨니 붕어 새끼 등이 족대에 잡히는 그 기분을 유년시절에 나도 해 봤으니 충분히 안다. 나이 들면 동심의 세계가 더욱 사무치게 그리울 거라는 추측을 한다.
괴강에 발을 걷고 들어가 이곳저곳 족대를 재고 돌 등을 제쳤지만 기대대로 고기들이 들지 않는다. 더구나 위쪽 괴산댐에서 물을 방류하는지 시나브로 수량이 많아지는 게 느껴지자 겁이 난다며 그만 나가자고 형이 먼저 백기를 든다. 그래 물에 발을 담근 지 10여분 만에 족대를 둘러메고 나오고 말았다.
대신 가까운데 매운탕집이 몇 군데 있어 들렀지만 추석이라 죄다 장사를 안 한다. 읍에 나와 시장을 돌았다. 태반이 문을 닫은 중에서 그나마 영업을 하는 식당에 들어 저녁을 먹는다. 밥을 먹으면서 건너다보니 형도 형수도 많이 늙었다. 나 나이 먹는 건 생각도 안하고 언제 저렇게 늙었나 하며 공연히 마음이 울적하다.
나도 기숙생활을 하는지라 형 내외를 모실 처지도 못되고 어디 모텔이라도 잡아드리려 했는데 그냥 집에 가서 자는 게 편하다며 굳이 가겠다고 한다.
기껏해야 동생 만나 두 시간도 못 되게 놀고 갈 거면서 길 막히는 추석길을 달려온 셈이다. 몸이 건강하지 못해 야간운전은 피곤해서 내키지 않아 하는 걸 안다. 어둔 길을 귀성객들 차량에 휩쓸려 밀려 갈 것을 생각하니 몹시 미안하고 마음이 불편했다.
잘 가라는 인사를 하고 헤어져가는 차를 보면서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진다. 형제간의 정의란 뭘까. 형도 아닌 동생을 보겠다고 먼 길을 달려온 사람의 가슴은 얼마나 허한 것인지. 형과 아우로써 살갑게 지내보지 못한 그간의 회한들이 울컥울컥 목울대를 넘는다. 동생 보러 왔는데 따뜻한 밥 한 끼 못 해주는 독신의 처지가 몹시 처절한 순간이었다. 아 나도 이젠 나이를 먹었다. 이제까지 알지 못하던 이런 애틋한 감정에 눈물을 쏟다니.
저물어 가는 서녘 하늘에 붉게 황혼이 지고 있었다.
형, 걱정근심 없이 마음 느긋하게 편하게 살자. 형수도 오래오래 아프지 말고 즐겁게 살자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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