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마로니에는 지고 있겠지.
과연 여기저기 마로니에 잎이 떨어져 구르고 있다.
마로니에 공원.
이름은 마로니에 공원인데 마로니에는 몇 그루 없고 죄다 은행나무다. 예전 서울대학교 문리대와 법대가 있던 곳. 학교가 관악갬퍼스로 이사 가고 마로니에는 남아 공원이 된 후에도 자연스레 ‘마로니에공원’이 되었다 한다.
그날도 마로니에공원에는 이파리가 노랗게 조락하고 있었다. 여자친구와 만나고 있었다. 전화가 하나 걸려왔다. 아니 문자였던가. 조락하는 나뭇잎처럼 내 기억도 조락하고 있어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 어쨌든 모르는 전화번호였다. E였다. 서로 전화번호 주고받은 적은 없었다. 반가웠다. 여자친구 눈치 못 채게 슬쩍슬쩍 답장을 했다. 여자친구를 사랑했고 E와는 그저 안면 정도 있는 정도의 친분인데 더구나 기껏 시덥지 않은 안부문자일 뿐인데 어쩐지 불륜이라도 저지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사실은 그것이 나중에 진짜로 연인이 될 줄은 그녀도 나도 짐작조차 못했다. 아니다. 결과론으로 보면 E는 외롭고 허했던 모양이다. 내 블로그에서 전화번호를 알았다 했다. 다원에서 어떤 계제에 블로그 이름을 말해 주었었다.
강원도로 왔다고 했다. 남편이랑 이혼했다고 한다.
내 자의적인 해석에 따르면 남편과의 불화로 이혼을 생각했고 그때 생각난 것이 나였고 내가 있는 강원도로 발령을 신청했고 일련의 상황들에서 그녀는 몹시 힘들고 외로웠다.
내가 아니었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그 대상이 되었겠지만 상처 깊은 그녀가 제일 먼저 생각난 게 나였다는 사실은 정말이지 감정이 무심할 수는 없는 일이다.
신행 인사하러 온 그녀를 처음 봤을 때 느 남편 되는 이가 참으로 부럽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상형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내가 먼저 만났다면 연애를 했으리라 하게 매력적인 여자였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순간의 감정이었지 그 이후로는 거기에 연관된 정신을 한번도 가져보지 않았다.
이듬해 봄 다원에 그녀가 나보다 먼저 와 있었다. 봄 한 철을 그녀와 지내면서 나름의 교감을 나누었다. 맹세컨대 남자와 여자로서의 감정은 전혀 이입되지 않았다. 적어도 나는. 결혼한 지 겨우 한 해가 된 그녀에게서는 휑한 바람이 느껴졌다. 결혼생활에 대해선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지만 내게 전해오는 느낌은 그녀는 그리 행복하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 지인들로부터 듣는 편린의 이야기들에서 둘 사이가 편하지 않음은 자명해졌다. 그것뿐이었다. 그리고 아무런 감정 없이 이별의 인사를 하고 떠나왔다.
그리고 그해 가을 마로니에 이파리가 누렇게 조락하는 공원에서 그녀의 전화를 받았던 것이다. 이혼했어요. 강원도로 발령받았어요. 당신이 가까이 있어서 그래도 조금은 위안이 될 것 같아요.
그 와중에 나는 여자친구와 이별을 했다. 그 때문인가. 나는 E에게 확 다가가 있었다. 전화통화를 하고 그보다 많은 문자통신을 했다. 어느 때 E를 연인으로서 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녀는 나를 좋아했지만 선뜻 연인으로 다가오려 하지는 않았다. 내심 망설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고 꼭 그 거리에서 연애도 아닌 교우도 아닌 교제가 이어졌다.
부안에 있을 때였다. 가을이었다. 은행잎이 바람에 죄다 떨어졌다는 문자를 받았다. 그날 저녁 다시 문자를 받았다.
사랑해요.
앞뒤 없이 무슨 소린가 나를?
확인하려고 답장을 보냈다.
나를?
그런 것 같아요. 사랑하는 거 같아요.
사랑하면 사랑하는 거지 같은건 뭐람.
나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뛸 듯이 기뻐해야 정상이거늘 그리 미적지근한 감정이 생긴 건 그녀의 마음을 이미 알고 있었고 언젠가는 그 마음을 전해올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기로 한 것이 예정대로 왔던 것이다.
사랑하는 것 같다는 그 한마디면 족하지. 그것 이상 듣기 좋은 말이 얼마나 될까.
그렇다고 이전까지 달라질 것은 없었다. 사랑한다고 결혼할 것은 아니다. 그때까지 해왔던 것처럼 사랑하고 위로하고 위로받고 연애하면 되는 것이다. 그랬다.
유독 가을을 탄다. 이 죽일 놈의 가을.
결국 E는 다시 전남편에게로 돌아갔다. 내게 실연감이나 상실감은 없었다. 이 또한 오기로 예정되어 있던 것이 왔던 것이었으니까.
그해 여름 경주에서 마지막으로 만났다. 그리고...
또 가을이었다. 경주에서의 해후 이후로 계절이 하나 지나가고 그녀에게서 소포와 함께 편지를 보내왔다. 나는 어느 농가의 놉으로 일하고 있었다. 화물차의 짐칸에 올라앉아 연도에 짙게 물들어가는 나뭇잎들을 보며 오싹 추위를 느꼈다. 땟구정으로 얼룩진 몰골을 하고 돌아오니 편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 지나가는 바람이라 여기자 그랬죠
그럽시다. 그리고 바람은 이미 지나갔습니다
터미널에 도착해서 정처없이 시내를 서너 시간 걸었나 봅니다. 불과 두 세 시간 전까지 보냈던 시간들이 아득하게 여겨지더군요.
이젠 억지 친구로도 남을 수 없으니 정말 아득한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힘들고 외로울 때 위로가 되어준 사람으로 내 안에 남아 있을 겁니다.
당신도 당신 나름의 의미로 나를 추억해주길 바랍니다. E.
사랑아 너는 끝내는 무지개나 안개
또는 저녁놀 같은
허무의 빛 그늘이다
이 죽일 놈의 가을. 가을은 나를 미치게 한다.
그날 E가 내게 다가왔던 날처럼 이 가을 또 마로니에 잎은 저리 조락해가고 나는 누군가 버리고 간 사랑들을 주워 주머니에 담는다.
슈베르트 즉흥곡 4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