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햇빛 속으로

그 소녀

설리숲 2016. 12. 21. 20:51


 교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학생들을 보면 자꾸만 옛 향수를 느끼는 건 사람의 상정(常情)이라 특히 새하얀 블라우스를 입은 여학생들이 산뜻하고 정갈한 게 보기가 좋다.

 지난 가을이었다. 아우라지 역에서 새뜻한 교복 차림의 한 소녀를 보고 추억에 빠졌던 일이 있다. 호젓한 분위기가 좋아 나는 가끔 역 주변을 거닐곤 하는데 그날은 날이 제법 써늘했다.
 소녀는 여직 여름 교복을 입고 있었다. 초록색 체크무늬의 치마에 새하얀 블라우스였다. 얼굴이 까칠하고 입술이 퍼런 게 추워 보였다. 철길을 타고 저쪽으로 멀어지는 그 뒷모습을 보며 기억 속의 또다른 소녀 하나가 떠올랐다.


 나는 춘천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후평동은 시의 가장 바깥쪽 변두리로 말이 시(市)지 주민의 육 할 이상이 농사꾼인, 실제는 시골이었다. 우리 동네 앞으로 논이 펼쳐져 있고 들판 가운데를 가르며 개천이 흘렀는데 그 개천이 춘천시와 춘성군의 경계선이었다.
 개울 건너 숲 들머리에 집이 한 채 있었다. 그것도 어쩌다 지붕 한 끄트머리가 보일 뿐인. 그 집에 관해서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누가 사는지 식구는 몇인지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소녀 하나만 빼놓고는.

 그 소녀는 얼굴이 희었다. 너무 희어 푸른 빛이 돌았다. 나는 그녀를 볼 때마다 가슴이 짠했다. 얼굴만이 아니라 팔다리도 희었다. 게다가 몹시 가늘었다. 국민학교 꼬마인 주제에 그녀에게 애잔한 연민같은 걸 느꼈다.
 우리는 지지리도 가난했고 소녀네는 부자였다. 나는 국민학생이었고 소녀는 중학생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녀가 몹시 애처로웠다.

 소녀는 매일 개울을 건너 들판을 지나와서는 우리 집 앞을 지나다녔다. 그래야 버스를 탔다. 그녀가 들판을 걸을 때는 한 폭의 풍경화였다. 새파란 들판 가운데 그녀의 하얀 교복이 찍은 점 하나는 어찌 그리 아름답던지.

 소녀에 대한 사람들의 말은 여러 가지였지만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은 없었다. 가장 많이 회자된 게 백혈병이 걸렸다던가, 아니면 폐병이나 심장병이라던가. 어느 것 하나 확인은 안 됐지만 무슨 몹쓸 병에 걸린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았다. 그런고로 내가 누나뻘인 그녀에게 애련(哀憐)을 품었으니.

 우리 집 앞을 지날 때 치마 아래로 드러난 다리는 울컥 눈물이 나게 가늘었다. 그래 일부러 보지 않으려고 소녀가 먼발치에 보이면 나는 집안으로 슬며시 들어가곤 했다. 저녁에 들판을 걸어 집으로 돌아갈 때도 노을 받는 그 모습이 왜 그렇게 가슴이 아리던지.

 무엇보다도 겨울이 문제였다. 소녀는 외투도 입지 않았다. 검은 교복 치마에 기껏 얇아 보이는 스타킹만을 착용했다. 아무리 동복이라지만 목도리와 벙어리장갑을 한 것 외에는 너무도 허술한 맨드리였다. 사실로 우리 집 앞을 지날 때 그녀의 창백한 얼굴은 더욱 파랬고 가냘픈 몸매는 된 겨울삭풍에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 같았다.
 나는 한번도 본 적 없는 그녀의 부모를 원망했다. 불쌍한 딸을 어찌 그리 추운 차림으로 내버려 두는가고.
 눈 덮인 들판은 흑백의 수묵화였다. 그 그림 가운데 소녀가 걸어갔다. 전깃줄은 윙윙 울고 설한풍은 소녀의 창백한 뺨과 새처럼 가는 다리를 무자비하게 할퀴고 들판을 휩쓸었다.

 어느날, 동무들과 놀고서 집에 왔는데 정말 뜻밖이었다.
 안방에 소녀가 앉아 있었다. 엄청나게 추운 날이었다. 새빨갛게 얼어 집 앞을 지나가는 그녀를 엄마가 보시고는 혀를 차며 다짜고짜 방으로 데리고 들어오셨던 것이다. 아랫목에 상시 깔아 놓은 요 속에 두 다리를 뻗어 넣고 앉은 소녀는 숫기가 없어 혼례식 새색시처럼 누구와도 눈을 맞추지 못하고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어머니가 뭐라고 물어보는 것에만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소리로 네, 답할 뿐이었다. 난생 처음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 가냘픈 목소리는 또 어찌 그리 애달픈지. 가까이서 본 얼굴은 희어서 그런가 정말 예뻤다. 어쩌면 나는 소녀에게 연정을 품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국민학교를 졸업하여 중학생이 되었고 소녀는 중학교를 졸업하여 그 후로는 다시 보지 못했다.
 그리고 고등학생이던 어느 날.
 당시 나라는 혼란의 극치였다. 광주 민주화운동을 절정으로 하는 군부와의 투쟁, 이데올로기의 방황 등으로 눈뜨고 귀 열린 이들의 거대한 함성의 소용돌이였다.
 대입을 앞둔 우리에겐 그 모든 혼란이 강 건너에 있었다. 날마다 도시락을 두 개씩 가지고 다녔고 밤늦게 파김치가 되어 돌아오곤 했다.
 부모님이 구멍가게를 하는 친구가 있었다. 그날 그의 부모님이 안 계신 관계로 그 친구가 가게를 본다 하기에 나도 같이 그 가게에서 노닥거리고 있었다.
 최루탄 자욱한 거리에서는 연일 시위가 있어 웬만한 소란에는 다들 익숙해져 있었다. 그밤에도 역시 시끌하니 또 한바탕 해대는 모양이었다. 그런 중에 웬 아가씨가 가게로 뛰어들었다. 직감적으로 시위학생이란 걸 알았다.
 그런데 아니!
 그녀였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한번도 본적이 없고 머리에서는 진즉 잊혀졌던 그 소녀.
 눈이 마주쳤다. 아는 체는 해야겠는데 도대체 어색해서 어쩔 줄을 모르다가 그냥 외면해 버렸다. 그 쪽에서 나를 못 알아보기만을 믿었다. 


 - ...숨겨 줄래요?
 소녀가 숨을 헉헉거리며 말했다.
 세월은 모든 것을 가능케 한다고 했던가. 나는 소녀가 혹 불치병으로 죽었을지 모른다고 그녀가 이따금 생각날 때 미루어 짐작했었다. 그 몸은 절대 오래 살아 있을 몸이 아니었다.
 한데 소녀는 내 앞에 나타났고 더욱이 병자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는 용감한 전사였고, 당당한 잔다르크였다. 숨겨 달라는 부탁도 애걸이 아닌 떳떳한 요구였다.
 어느 겨울날 우리 안방에서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하던 창백한 소녀가 아니었다.
 내 동무는 기꺼이, 아니 소녀의 위풍당당함에 기가 눌려 가게 쪽방에 그녀를 숨겨 주었다.
 그게 끝이었다. 밤이 깊어 나는 집으로 돌아왔고, 다음날 친구는 소녀가 곧바로 잡혀갔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아우라지 역의 여고생은 가을날의 정취를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철길을 걷다가는 엎드려 은행잎을 줍기도 하고 또 몇 발짝을 가다가는 휴대폰을 꺼내 버튼을 눌러 대기도 했다.
 멀찍이 그 모양을 보고서서 나는 생각했다. 저 소녀는 대여섯 해가 지나면 어떤 모습이 돼 있을까. 지금은 저렇듯 조락을 느끼는 감성 많은 소녀지만 그때는 어떤 잔다르크가 돼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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