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숲에서

싸리나무

설리숲 2013. 7. 8. 23:27

 

 

   남녘에서는 대나무가 있어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죽세공품들을 댓가지로 만들었으나 대나무가 없는 북녘은 싸릿가지가 만능이었다. 종다리 바구니 소쿠리 삼태기 등 생활용품부터 윷가락 연 등 놀이기구도 죄다 싸릿가지였다. 대나무처럼 잘 휘는 성질이 있어 생활 곳곳에 요긴하게 쓰였다. 더구나 다행스럽게도 강원도 산에는 이 싸리가 지천이었다.

 싸리나무의 또 하나의 특징은 태워도 연기가 나지 않는 것이다. 빨치산들은 반드시 싸리나무를 써서 적으로부터 효과적으로 은폐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하나 이것은 회초리용으로도 아주 그만이었다.

 

 박문수가 암행할 적에 어느 날 날이 저물어 겨우 인가를 찾긴 했는데 여자 혼자 사는 집이어서 주인이 한사코 들이려 하지 않았다. 이 길로 날 깝살리면 필시 산짐승의 먹이가 될 터 어찌 이리도 매정하냐고 통사정을 하여 겨우 허락을 얻어 들었는데 단칸방 가운데다 천으로 휘장을 치고는 위아래 생면부지의 외간남뇨가 누웠다. 집을 떠나 오랜 객고에다 한참 혈기방장한 박문수라. 슬그머니 음심이 생겨서 자신의 신분을 잊고 천을 들치고 여자에게로 침범했다.

 그러자 여자가 크게 소리를 지르며 호통을 쳤다. 보자니 행세깨나 하는 선비인 것 같은 양반이 무슨 이런 천박하고 경솔한 짓이냐고 사정하여 겨우 얻은 동정을 이런 식으로 내치겠냐고 야리한 외모와는 다르게 준엄하게 꾸짖는 것이다. 그리고는 당장 나가서 회초리를 해 오라고 호통을 쳤다. 그 서슬에 박문수는 마당가에 있는 싸리나무를 꺾어 여인에게 건넸고 그걸로 적잖이 종아리를 맞았다. 그리고는 머리 조아려 여인에게 용서를 빌었다. 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부인의 꾸짖음에 진심 정신머리가 깼습니다. 부디 저의 죄를 엄벌해 주십시오. 그는 진정으로 자신의 실수를 참회했다.

 암행어사라 하면 임금의 대리요 그 권세 또한 임금 버금이니 그까짓 촌 아낙 하나 겁탈하는 거야 파리 하나 죽이는 것보다도 대수롭지 않은 일이지만 진정으로 뉘우치고 참회하는 그 품성은 과연 군자였고 박문수가 후세까지 존경을 받는 건 다 그만한 대인배였기 때문이다.

 

 이 일이 있은 후 어느 날 또 같은 상황에 처해 민가에 들었는데 역시 여자 혼자 사는 집이었다. 사정하여 이번엔 단칸방이 아니라서 웃방에 들었는데 이런! 한밤중에 여인네가 웃방으로 올라와 박문수를 겁탈하려 했다. 박문수가 호통을 치면서 전의 여인이 했던대로 회초리를 꺾어오라 야단을 쳤다. 그리고 역시 싸릿가지로 여인의 종아리를 때렸는데 그때 다락문이 열리며 사내 하나가 칼을 들고 내려왔다. 사내는 박문수 앞에 엎드려 큰 절을 올리며 사정을 이야기했다.

 저의 내자가 좀 색기가 있어 동네소문이 별로 좋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칼을 들고 저기 숨어 있다가 여차하면 사내놈과 계집 죄다 요절낼 생각이었다면서 뉘신지는 모르나 그 고매한 인품에 깊은 감명을 받았노라고 계집의 소행은 사지를 찢어야 마땅하나 저를 보아서라도 용서해 주십사 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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