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 조환가. 비가 내린다. 사람 사는 데 비야 못 올랴마는, 산골골 도처에 웅크려 도사리고 앉은 멍덕 같은 겨울이 여전히 꿈쩍하지 않는데 비가 내린다.
작년 가을 11월 6일에 마지막 본 비, 그 뒤론 내내 눈이었다. 얼마만의 님의 왕림이신가. 지루하고도 황량한 겨울 하늘. 아직은 눈이 내려야 정상이다. 그런데 비가 내린다. 뭔가 이상하다.
다른 지방엔 비가 내린대도 이곳은 별 세계라. 늘 눈이고 하늘과 땅이 다 눈이다.
그래야지 정상이다.
오늘 전국적으로 비가 내렸다. 이웃인 강릉이나 삼척 등 영동지방엔 폭설이 내려 대설주의보가 발령됐다. 한데 이 산간지방엔 비가 내렸다. 이 무슨 조환가. 살다 보면 이런 날도 있구나. 오랜 만에 맞아 보는 빗물. 작년 이맘때 비 맞으면 방사능 오염된다고 요란스럽게 겁을 주더니만 그립던 님은 머리 가뿐하게 산골골 푸근히 적시었다.
아 정녕 봄인가 보다. 필시 내일 아침에는 마당에 흰 눈이 쌓여 있을 것이다. 기온이 여전히 차니까. 그래도 강릉은 눈이 내리는데 비록 하루지만 이곳엔 비가 내렸다는 조화가 신기하고 대견하니.
겨울 정선
새벽 6시,
자명종 소리에 잠이 깬 나는
벌써 정선에 닿았다.
눈꽃 열차를 타고
세화 일근이와 다섯 시간을 달려
정선역에 내 몸이 부려졌을 때,
흰 눈을 이마까지 덮어쓴 내가
나를 마중 나왔다.
정선장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정선의 혼불은 먼 산에 쫓겨가흰 눈을 흡뜬 채,
관광안내 팜플렛을 가위손으로 썰어 날리고 있었다.
아리랑아리랑아라리요아리랑고개로날넘겨주게
녹음테잎 껍질처럼 쌓이는, 쌓이는 눈을 보며
정선역 앞 광장에서
뼛속까지 보이는 정선의 힘줄을 뜯어내며 찰칵.
겨울 정선을 찍었다. 필름도 없이.
돌아오는 밤 열차 안에서
뼈마디를 덜컥거리며 나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토해놓았다.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골짜기의 물까지
목구멍을 찢고 솟아올랐다.
순간 수도승처럼 야윈 내 얼굴이
차창 밖으로 벗겨져 날아갔다.
(그 때 나는 선로 끝에 서서,
나를 세상 속으로 떠나보내는 정선을 보고 있었다)
김옥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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