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햇빛 속으로

지금은 휴가중입니다

설리숲 2012. 3. 2. 01:05

 나도 휴가를 가고 싶다.

 모태 백수여서 평생이 휴가중인 나도 버젓이 휴가중임을 알리고 며칠씩이나 자리를 비우고 기분을 내는 샐러리맨이고 싶을 때가 있다.

 남들 다 일하는 그 시간에 집이든 어디 여행지든 일을 털어 버리고 홀가분하게 나만을 위한 시간을 즐겨 보고 싶다.

 

 전에 직장에 있을 때 여자 동료가 제 여동생을 내게 붙여 주려고 했었다.

 나는 생각도 안 하고 있었거늘 뜬금없이 제 여동생을 만나 보라고 넌지시 건네더니 그 다음부턴 성화바가지다. 노처녀 명찰을 단 지도 벌써 오래인 그녀, 정작 남자가 필요한 건 자기면서 엉뚱하게 제 여동생을 내미는 건.

 간혹 제가 맘에 있지만 차마 먼저 들이대진 못하고 애꿎은 동생을 이용해 남자를 떠보는 여성도 있는지라 그녀도 그런 건 아닐까 잠깐 착각도 했지만.

 어쨌건 제가 날짜도 잡고 장소도 잡으면서 하루 즐겁게 놀다 오라 한다. 별 내키지는 않았지만 하도 성화를 해 대는지라, 더구나 때마침 일도 하기 싫고 하루 땡땡이 치고 어디 좀 훌쩍 갔다 왔으면 하던 때라, 굳이 여자가 아니더라도 그냥 쉬고 싶기도 했었다.

 그 여동생을 만나 정직하게도 동료가 정해준 이름도 기억 안 나는 산으로 가을 소풍을 갔다. 초면의 남녀가 무슨 재미가 있을까. 첫눈에 찌릭 불꽃이 튀는 인연 아닌 담에야 그저 선보듯 상대방 호구조사나 취미 따위나 물어보는 맨송맨송한 놀이처럼 재미없는 것도 드물다. 더구나 그녀나 나나 굳이 남자를 만나고 싶고 필요해서가 아니라 강권에 목 이겨 심심풀이로 나왔으니 그저 서로 데면데면 그냥 등산길에 만나 방향이 같아 동행하게 된 모양새 이상은 아니었다.

 그래도 꼭 나빴다고만 할 수는 없고 어쨌거나 회사에 당당하게 나의 휴가를 공표하고 나왔다는 게 제법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녀도 그런 말을 했다. 꼭 회사를 다녀야만 내 생활을 영위해야 한다는 게 너무 불합리하고 적절하지 못하다고. 그냥 몇 달 아무 일도 안 하고 방구석에 뒹굴며 떡볶이나 먹고 똥이나 싸 봤으면. 늘 그런 상상을 한다고. 유일하게 공감대를 공유함을 발견하고는 내내 회사 얘기와 그 조직의 부정적인 것들만 씹어대며 하루를 유쾌하게 혹은 불쾌하게 그런대로 잘 보냈다.

 가을은 깊어 낙엽이 지고 진 낙엽이 두터이 갈려 사뭇 요란스레 가을을 내대던 만추의 어느 날이었다.

 이후로 그 동생은 한번도 보지 못 했다.

 어느 하루 스쳐가 평생 생각나지 않았던 편린 하나, 아마 저 달력 아니라면 그 생각조차 나질 않아 죽을 때까지 한번도 반추해 보질 않았을 그 가을 어느날의 단상이다.

 늘 백수여서 남는 게 시간이고 생활 자체가 휴가중이지만,

 나는 지금 휴가를 떠났다고 호기 있게 동료들에게 외치며 내 빈 책상에 저 달력의 문구를 며칠이나 방치하고 싶을 때가 가끔 있다. 돌아오서 쌓인 먼지를 닦는 기분도 꽤 괜찮을 텐데 그치야.

 

 

 

 얼굴 본 지도 몇 년이나 되어 물리적인 거리로 봐서는 친구라고 할 수 없는.

 그 친구가 매년 연말이면 잊지 않고 자기네 출판사 달력을 보내준다.

 고마워, 상경하면 밥 한번 먹자

 매 말뿐인 밥 먹자라는 약속을 한번도 이행하지 못하는 나.

 그 약속 나야 참말 진심으로 하는 말이건만 나 아닌 다른 어느 누가 보더라도 그저 빈말로 보일 테지. 그까짓 게 뭐 큰일도 아닐진대, 전화 한번 걸어서 약속하고, 만나서 반갑게 포옹하고, 회포 풀며 밥 먹고, 뭐 별거 아니건만 생활이라는 게 바쁘지 않아도 그렇게 또 맘먹는 대로 되어지지가 않는 것이다.

 방에다 호기 있게 ‘휴가중입니다’를 넘겨 놓고 다녀올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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