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초록의 茶園에서

편지

설리숲 2013. 2. 17. 18:49

 

 어느 해 여름장기도보 때였어요.

 숙소화장실에 남자여자 표시를 하려고 종이에 써놓긴 했는데 풀이 없어 붙이지를 못하고 가랑이라는 아가씨가 쩔쩔매고 있더라구요. 그래 내가 배낭에서 풀을 꺼내다 갖다주니 이 아가씨 표정이 참 재밌었는데-

 “아니 웬 풀을 갖고 다니세요?”

 그랬던 추억이 있어요.


 배낭에 왜 풀을 넣어 다닐까. 풀만이 아니라 내 가방 속에는 편지와 봉투, 엽서, 우표들이 들어있지요. 그러니 풀은 편지봉투를 붙이기 위한거.

 예전부터 여행을 할 때면 현지에서 누군가에게는 꼭 편지를 쓰는 습관이 있어. 그게 아마 객고에서 오는 일종의 휴머니스트 기질인가봐. 그게 어느 때부터는 상대가 여자들로만 바뀌더군 ㅋㅋ 내가 은근히 여자가 많잖아.

 모든 것이 속도화 디지털화로만 치닫는 세태에 이런 구식 종이편지를 쓴다는 게 참 미련한 짓이지만 그래도 그만한 매력도 없는거 같아. 마치 시골집에 있는, 예쁘지 않은 누나의 푸근한 정같은 그런...

 이런 내 생뚱함에 가랑이는 제법 신기했나봐. 덕분에 나는 로맨티스트라는 이미지를 얻었다지.


 그런 내게 악필로 뭔가를 적어보내고 싶은 당신이 있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이 편지가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르긴 하다만 그거야 장담할 수 없고- 모든 커뮤니케이션 중에선 그래도 이 구식편지가 가장 으뜸일거야. 전화, 문자, 이메일, 게다가 요즘엔 채팅, 홈피방명록, 카페꼬리글, 쪽지 등등 통신수단은 엄청 많더구먼 난 너무 직접적이고 빠른 건 영 생리에 안맞어. 자주는 아니라도 가끔, 아주 가끔 몇 자 적어 보낼 수 있게 당신이 내 곁에 남아 줬으면 좋겠다는... 욕심인가? 이런 욕심이라면 뭐 크게 나무랄 일도 아니겠네.


 다들 찜질방에 간다고 몰려나가고 나 혼자 남아서 적막과 고독을 즐기고 있네. 실은 적막하지도 않아. 새벽부터 엄청나게 비가 쏟아지더니 계곡물이 불어 그 소리가 귀가 다 아플 지경이야. 과연 지리산은 자연현상도 스케일이 달라.


 어젯밤 문자로 얘기했던거, 사랑과 결혼이라는...

 이곳에서 만나 작년에 결혼한 커플이 있어요. 올해 와보니 그 색시 되는 여자가 혼자 와 있더군. 10대 소녀처럼 야리야리한 아가씬데, 이틀째 되는 날 그와 얘기할 일이 있었는데 스스럼없이 얘기하더군. 그간 결혼생활이나 아이는 안갖기로 했다는 애기서껀 별 가깝지도 않은 나한테 그리 미주알고주알 털어놓는거라. 이후로 부쩍 가까워지긴 했지만...

 그래 그렇거니 무심히 넘겼는데 몇 날 지내다보니 아직은 신혼이면서 혼자 와 있는 것부터가 이부부가 평탄하지 않은걸 보여주는, 위기를 맞을 수도 있는 심각한 상태라는 게 감지되는거 있지. 작년 신혼여행 다녀와서 신랑각시 한복차림으로 이곳에 왔을 때 을매나 이쁘던지 절로 미소가 나왔었는데 불과 한 해 사이에 영 딴판이 돼 있는 꼴이란-

 뭐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다들 그렇게 보고 있는 모양이야. 어제는 첨으로 남편되는 이가 왔는데 오랜만에 보는 부부의 표정이 그리 환하지가 않으니 틀림없는거 같어. 애기를 안 낳겠다는 대목에선 어쩐지 섬찟하기도 하고...

 그래 어젯밤 사랑과 결혼이라는 걸 많이 생각했던 게야. 사랑보다 더 중한 게 인연이라는- 한번 어그러진 인연은 더 회복할 수 없다는.. 마치 한 번 붙였다 떼낸 테이프는 접착력이 약해 다시 붙여도 떨어지기 쉬운 것처럼...

 그리고 평행선이라는 것도 생각해 보고... 만나지 못해 아쉽지만, 그래서 그립고 목이 타지만, 대신 늘 영원히 가까운 곳에서 나란히 길을 가는 평행선.

 헤어지지 않고 영원히 동행하는 평행선이 오히려 한 단계 고차원적인 사랑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더랬지요. 에구 모가 정답인지 영원히 풀리지 않은 이 숙제라니-


 어떤 사람이 신심이 깊어 매일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어요. 그래 하느님이 두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 했더니 이 사람 첫째 소원이라는 게 하와까지 갈 수 있게 다리를 놓아 달라는 거였어. 하느님이 기가 막혀 예끼 이놈! 눤놈의 소원이 말같지도 않으냐. 집어치고 다른 소원 얘기하라 했더니 이 사람 또다시 입을 열기를,

 “그럼 하느님. 이번엔 여자문젠데요. 제 애인이...”

이 사람 미처 말을 잇기도 전에 하느님이 말을 잘라버리며,

 “그래 다리는 4차선으로 해줄까 8차선으로 만들어 줄까. 군데군데 휴게소도 만들어주랴?”

헹~ 전지전능하신 하느님도 골치 아픈 여자문제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여. 그만큼 남녀관계는 복잡하고 미묘하고 머리 아픈거겠지 끙.


 오후가 되면서 폭우도 누꿈해지고 허옇게 수증기가 올라가는 걸 보니 이제 비가 그치려나 어쩌련가. 여기 온지 열흘 남짓인데 기분은 오래 전에 속세를 등진 것처럼 모든 게 아득하기만 해요.

 이대로 청산 속에 푹 파묻혔으면 하는 충동도 들고 어서 정선 오두막집으로 가고 싶은 생각도 문득 나고, 그 와중에 시도때도 없이 어느 여인이 머리에 들어와 있구.

 그래서 출가자들이 애인은 물론 가장 근본관계인 어머니의 정도 떼놓고 입산하는 것을, 우매한 나는 그걸 다 가지고 들어왔으니...

 그게 다 당신을 시시때때 그리고 있다는 얘기니까 기뻐해줬음. 그나마 당신이 있어 늘 즐거운 기분으로 지내고 있음을... 에구~ 요 대목에선 신파조의 연애편지 같다. 이거 연애편지 맞나...

 언제 또 편지 쓸지는 모르나 나 하산하면 그때 회포 많이 풉시다. 너무 많이 말고 조금씩만-

 잘 지내요.

 이 편지는 쓰긴 쓰되 언제 부칠지는 몰라요. 면소재지까정 나가야 하는데 에고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써서 아침 피씨방 나갔다올 때 부치고 올걸. 아님 찜질방 간 사람들한테 부탁해도 되는 건데 쯧쯧-


 글씨가 형편없어 괴발개발 읽느라면 눈좀 어지럽겠지만 봐줘요. 이래봬도 당신에게 향한 애정은 제법 담긴 편지라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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