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햇빛 속으로

슬픈 고란초

설리숲 2006. 9. 29. 22:50

 

 피안화(彼岸花)라는 꽃을 찾아 헤매던 때가 있었다. 무슨 큰 화두인 양 그것을 찾아 전국의 사찰과 암자를 섭렵하던 중에 부여를 지나게 되었다.

 부여에는 유명한 고란사가 있다. 오랫동안 가보고 싶었던 고란사와 낙화암이었다. 밤나무 잎이 스럭스럭 떨어지는 한가을이었다.

 나지막한 부소산. 여기저기 산재한 옛 백제의 흔적들, 또는 새로 만든 건축물들을 둘러보며 낙화암에 섰다. 벼랑은 천길만야 아득한데 그 아찔한 백마강 푸른 물을 내려다보며 그날 꽃처럼 떨어져간 여인들을 생각했다. 슬픈 나라의 슬픈 운명.


 고란사로 내려갔다. 노래가사에까지 여러 번 등장하는 낙화암과 고란사라.

 떠들썩하지 않고 조촐하면서도 많은 탐방객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명성에 걸맞지 않게 소박하고 아담한 사찰이었다. 깎아지른 절벽 아래 자리잡은 고란사와 주위 풍광은 만약 내가 화가여서 그것을 그린다면 화면 전체를 어둡게 채색할 것이다.

 고란사의 첫인상은 그렇듯 음울했다. 글쎄 이건 나만의 느낌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내가 잠시 후에 본 것은 그보다도 더 어둡고 음울했다. 뜰층계 아래서 삼배합장을 하고 법당 뒤란으로 돌아갔다. 거기 고란초가 있었다. 고란초가 있어서 절 이름을 고란사라 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반대로 고란사에 있어서 식물 이름이 고란초가 됐다는 이야기도 있어 '닭과 계란'같은 문제지만 어쨌든 말로만 듣던 고란초가 과연 거기 있었다.

 아주 예쁘게 유리상자 안에 포장이 되어 있었다.


 유리상자에 들어 있는 고란초를 그러나 나는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다. 누가 그 따위 짓을 했는가. 제 터전에서 제게 맞는 양분과 흙과 바람을 먹고 살아야 할 고란초를 누가 유리벽 안에 가둬 놓았는가.

 유리벽을 깨부숴야 할 것을, 그러나 그럴 수는 없어 나는 혼자 가슴이 아팠다.


 동물원.

 누가 그런 짓을 했는가. 단지 인간들 구경거리로 전락해 스러져 버린 슬픈 생명들. 그들도 제 터전에서 사랑하는 어버이와 자식과 남편 아내와 함께 살고 있었을 것이다. 무지막지한 인간들의 올가미에 씌워져 선혈을 흘리며 끌려 왔을 것이다. 공포에 질린 채 똥을 갈기며 울부짖었을 것이다.

 철창 안에서 인간들을 내다보며 이미 야성과 본성을 잃은 그들의 눈은 초점이 없다. 누가 그 따위 짓을 했는가.

 호랑이. 지구상의 숲속에는 이미 호랑이가 전멸하기 일보직전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래서 멸종이 되기 전에 잡아다가 보호해야 한단다.

 웃긴다. 새대가리다. 어차피 숲속에 호랑이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있는 호랑이라도 숲에서 살게 해야 마땅한 게 아닌가. 보호한답시고 철창 안에 가둬 놓은들 숲에서 나온 호랑이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씨만 보존한다고 보호가 되는 게 아니다. 이미 제 습성과 본성을 잃어버린 호랑이가 철창 안에서 인간들을 상대로 재롱이나 부리고 있는 게 호랑이 보호런가.

 그들이 사라져 버린 숲은 이제 황무지가 될 것이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뻔하다. 우리의 숲에는 파괴만이 있을 뿐이다.

 미국 백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한 짓이 무엇인가. 총칼로 원주민을 몰살시켜 놓고는 뒤에 와서는 그들을 보호한답시고 '인디안 보호구역'을 만들어 가둬놓지 않았는가.

 같은 인간에게도 이런 악랄한 짓을 벌였을진대 하물며 말 못하는 짐승들에게랴. 잡아다가 돈 받고 구경 시켜 주는 인간이나 돈 주고 들어가서 히히 원숭이 노는 걸 구경하는 인간들이나 우리는 어찌 이리 악랄하고 무도한지 모르겠다.


 고란초는 예쁘게 유리상자 안에서 보호되고 있었다. 동물원에서 철창을 부러뜨리지 못한 것처럼 나는 그 유리벽을 깨부수지 못하고 그냥 발길을 돌려 나왔다. 왜 유리를 씌워 놓았냐고 따지면 필경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고란초는 워낙 희귀해서 그냥 두면 멸종될 거요. 그래서 이렇게 보호하고 있지요. 나는 자연보호주의자요.


 음울한 기분을 안고 말없이 돌아 나올 때 등뒤로 고란초의 슬픈 울음이 들리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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