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마저 잔잔한 숲은 만귀잠잠하다. 과장 없이 낙엽 하나 떨어지는 소리가 자냥스럽게 돋들린다. 저만치서 바스락거리는 노루 발자국소리가 들리다가 후다닥 튀는 소리도 들린다. 소리는 들리되 모습은 안 보인다. 숲에서는 예전의 소머즈처럼 필요 이상의 능력이 생기는 것이다.
오늘은 고라니를 보았다. 바스락거리는 예비 신호음도 없이 느닷없이 튀어 달아난다. 늘 겪는 일이지만 그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라곤 한다. 녀석은 숲에서 나가 묵은 벗밭을 가로질러 건너 숲으로 들어갔다. 묵정밭이 제법 가팔라서 맨몸으로 오르기도 숨이 가쁜데 놈은 힁허케 사라지고 말았다. 뒤이어 또한번 후다닥 소리 들리며 또 한 마리가 튀어나오더니 역시 먼젓 놈이 사라진 그 숲으로 튀어 들어간다.
이따금 밤길에 시골길을 천천히 운전하고 가다 보면 어슬렁 고라니가 길을 건너는 것을 본다. 대개 두 마리라 연인임을 미루어 짐작한다. 그런데 숲에서 만나는 고라니는 대개 혼자다.
오늘은 두 마리여서 신기해하고 있는데 또 한번 후다닥 소리가 들린다. 아이쿠 이거 뭔일이래 하는데 이번에 튀어나온 놈은 고라니가 아니다. 하얀 곱슬털을 휘날리며 개 한 마리가 역시 고라니가 사라진 뒤를 따라 벗밭을 달려 올라간다. 아하 고라니는 나를 보고 놀라서 달아난 게 아니었다. 개에게 쫓기고 있었던 것이다. 두 마리는 연인이 아니라 뒤쫓아간 놈이 덩치가 작은 걸로 보아 새끼임을 짐작한다. 아무리 위급해도 제 새끼를 놔두고 저만 도망치는 어미라니. 사정 모르는 나는 어미를 나무라고. 그러고 보면 고라니들도 개도 실은 나의 존재는 알지도 못한 거였다.
이미 저편 숲으로 고라니들은 사라지고 개도 그쯤 어디를 향해 벗밭을 달려 올라가지만 나는 혼자 웃는다. 지까짓게 무슨 재주로 고라니를 잡는담. 다리도 짧으면서. 그래도 그 짧은 다리로 흰둥이는 호기있게 밭을 가로질러 역시 그 숲으로 사라진다.
사람의 미약함을 깨닫는다. 짧은 다리로 고라니를 쫓는 개를 비웃었지만 개는 사람을 훨씬 뛰어넘는 능력으로 수월하게 비탈밭을 뛰어올라갔다. 내가 똑같은 코스를 쫓아 뛴다면 개보다 다섯 곱절이나 더 걸릴 게다. 그나마 반도 못 다다라 숨이 차 주저앉을 게다. 이 자연과 숲에 생존하는 생명들은 모두 인간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언젠가 계곡 아래로 날아 내리는 때까치를 본 적이 있다. 늘 쳐다보는 새가 아니라 발 아래로 날아 내려가는 그 자태가 얼마나 경이로웠는지. 아, 사람은 왜 저렇게 멋지게 날 수 없을까. 가장 초라한 개체임을 절감했다. 그런데 뒤이어 새매 한 마리가 더 빠른 속도로 계곡을 날아 내려갔다. 순식간에 때까치에 접근하자 때까치는 공포의 비명을 질러대고 곧바로 푸드득 깃털이 흩날리며 단발마의 비명도 끝났다. 아, 그 경이로운 새들의 세계. 발 아래로 생생하게 보는 자연의 섭리와 질서들. 공포에 질린 채 죽어간 때까치에게는 미안하지만 만화의 한 장면처럼 펼쳐진 그 멋진 영상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으리라. 더더욱 인간의 초라함을 느끼던 그 순간이었다.
가장 나약하고 열등한 인간이 이렇게나마 뭇 개체들 위에 군림하는 것은 빛나는 지능이 있어서다. 아니 그렇다고 다들 그런다. 나는 전적으로 인간의 지능을 신뢰하지 않는다. 어쩌면 저 고라니가 더 높은 지능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다만 그들은 그것을 악용하지 않을 뿐이고 사람은 그것을 가장 극대화하는 차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무욕과 탐욕의 차이라 할까.
가끔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개가 있다는 기사와 함께 사람들은 거참 똑똑하고 지능이 높은 놈일세 하고 신기해하곤 한다. 뭐 시스템 자체가 다른 개체니 말을 알아듣는다는 게 허무맹랑한 일이요만 설사 그렇다고 치면 사람은 참으로 부끄럽고 치욕스러운 것이다. 개는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데 사람은 개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으면 인간이 짜장 열등한 종족 아닌가.
인간은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라 자칭한다. 그리고 눈부신 문명을 건설한다고 유사이래 줄곧 파괴만을 자행하고 있다. 어쩌면 사람보다 더 지능이 우월할 수도 있는 숲속의 짐승들은 이러한 파괴 없이도 수많은 세월을 이어내려오고 있다. 사람의 파괴만 없다면 자연은 아무 문제가 없을 테니 진정 이곳의 주인은 그들이다. 인간은 그 알량한 지능만 내세워 여전히 파괴할만한 건수를 찾는데 혈안이 돼 있다. 인구는 점점 늘어나고 그 인구가 먹고 살기 위해 세상은 아귀다툼이다. 전기가 모자란다고 수력 화력을 지나 곳곳에 원전을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이제는 그 원전의 공포 앞에 나체로 서 있다. 어느 나라 어느 땅에서 방사능이 나오든지 지구상의 모든 생명들은 그 화를 면하지 못한다. 이제 인간의 꿈은 끝이 보이는 것 같다. 자신이 저지른 것도 책임질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의 능력은 수명이 다했다.
가장 완벽한 건 자연이고 숲이다. 나는 자연의 다른 종족들이 인간보다 더 높은 지능과 능력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고 믿는다. 이제 인간이 저지른 이 말세의 혼돈을 그들이 해결하고 치유하는 기적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그들에게 저지른 패악과 폭력이 자심해 그 기대조차 뻔뻔하고 염치 없는 짓이다.
지금 숲은 여전히 잔설이 깔려 있고 그 속에서도 생강나무는 노랗게 꽃을 터트리고 있다.
겨울이 끝나려는가.
고라니 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