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25일은 고 이문구 선생의 15주기였다.
15년 전 그날은 내게도 큰 의미가 있는 날이었다. 세상과 떨어져 자연 속에 묻혀 살리라 소원만 하다가 정말로 나선 길이었다.
함양 공동체마을을 나와 무작정 강원도로 들어갔다. 그곳 산촌에는 내 한 몸 뉘일 오막집이 있을 것을 굳게 확신했다. 말 그대로 첩첩산중의 고장이었다. 남쪽은 이미 매화가 꽃잎을 터트리고 있는 걸 보고 떠났다. 강원도는 깊은 겨울에 잠겨 있었다. 골골샅샅 길이 보이는 곳이면 다 들어가 보았다.
그러던 그 어느 날에 이문구의 부고 뉴스를 들었다. 그날은 내 생일이기도 했다. 누나가 보낸 문자 메시지로 알았지만.
그 골짜기에 눌러앉아 13년을 살았다. 내 인생의 굵직한 터닝포인트였다.
독서를 좋아하는 누나들의 가풍(?) 덕에 어릴 적 이것저것 책을 많이 보았다. 누나들이 읽던 책이었으므로 개중엔 어른들만 읽어야 하는 책들도 있었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탐독했다. 그런 책들이 결코 내 정신 성장에 부정적으로 작용하진 않았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누구한테 충고하라면 ‘읽어서 나쁜 책은 없다. 나쁜 책이 나쁜 길로 인도한다는 것쯤은 정상적인 사람이면 다 걸러내고 자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려고 한다.
누나들 덕분에 김유정을 만났다. 그의 소설을 읽으면서 막연히 작가의 길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김유정은 내게 도화지를 제공했고 황순원은 밑그림을 그려 주었다. 그리고 밑그림에 화려한 채색을 해준 이가 이문구다.
소재와 문체 문장력이 가장 한국적인 작가다. <관촌수필>과 우리 동네 시리즈는 그의 대표적인 작품이면서 한국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문학은 요설체여야 한다는 게 이문구의 지론이다. 백번 지당한 말이다. 문학의 태동이 난롯가에 모여 앉아서 이야기하는 것에서 시작됐다고 하거니와 문학은 입에서 나오는 그 이야기들을 글로 옮기는 것이다. 글쓰기? 절대 어려운 게 아니다.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시작하고 써야 할지 깜깜하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이야기는 참 재밌게 잘 한다. 그 이야기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글로 적으면 그게 소설이다. 그런데도 글을 못 쓰겠다고 한다.
이문구는 이 쉬운()? 글쓰기를 일상화한 작가다. 그의 소설은 이론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소설작법을 무시한다. 그냥 옆집 이장님과 담 너머로 넘겨다보며 아침에 물꼬를 보러 갔는데 발뒤꿈치에서 뭐가 꽥 하길래 보니 뱀개구리가 내 발에 밟혀 널브러져 있더라고. 원 재수도 드럽게 없는 놈이지, 뭐 이런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고대로 소설 속에 옮겨 놓는 것이다. 아주 쉽지만 그것이 소설이 되게 만드는 것 이문구의 뛰어난 필력이다.
그의 작품은 우리말의 보고이기도 하다. 농촌사회에서 일상적으로 쓰던, 그러나 점차 잊혀가는 우리말들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인다. 그 소설들을 읽으면서 나는 처음 대하는 단어들을 하나하나 노트에 적었었다. 나 역시 그 우리말들을 살리는 작업을 하고 싶었다.
<관촌수필>은 그의 고향인 보령 대천의 마을 이야기다. 토정 이지함의 뼈대 있는 후손임을 영광과 긍지로 살아온 할아버지와, 그러나 전쟁으로 인하여 이러한 구시대의 패러다임이 무너져가고 그 뿌리였던 농촌사회가 신문명으로 교체되는 낯설음의 시기, 그리고 완전히 변해 버린 고향마을에 대한 허허로움이 애련하게, 그러나 감성을 호소하지 않는 절제된 문장의 수작이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감정을 절제했으나 그것이 오히려 독자에게 애련한 허무를 준다. 근대화로 해체되어 가는 전통문화의 한 상징이다.
2월 25일, 작가의 15주기에 맞춰 벼르던 관촌 마을을 찾았다. 당연히 소설 속의 관촌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작가는 이 작품을 70년대에 발표했는데 그때도 고향 마을의 변화에 허전함을 토로했다. 그로부터도 40여년이 지났으니 뭐 어련할까.
그가 바라보고 뛰어놀며 보내던 갯벌로 KTX가 지나가고 최첨단의 대천역이 육중하게 서 있다.
마을은 우리나라 어느 곳에서도 보는 비슷비슷한 부락이다. 소설 속에 자주 나오는 부엉재에는 아파트단지가 서 있고 작가의 생가터로 짐작되는 곳에는 평범한 양옥집이 들어앉아 있다. 입구에 관촌이라는 마을을 소개하는 비(碑)만이 다를 뿐이다.
행여 자신에 대한 추모비나 문학관 같은 것은 만들지 말라고 한 고인의 유고에 따라 고향 대천에는 작가의 흔적이 전무한 상태다. 다만 지역의 한내문학회가 고인과 작품을 선양하고 있다.
부엉재
이문구의 작품에 자주 나오는 솔버덩. 주로 충남과 전라도 등 들판이 넓은 지역에 많이 잇는 독특한 지형이다.
이지함 묘.
이문구의 조부는 한산 이씨 목은 이색, 토정 이지함의 후손이라는 자긍심으로 살았다. 그것은 무너져가는 예 체제에 대한 마지막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고 이문구 선생의 생가터로 추측되는 386번지와 387번지 주택
관촌 부락에서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건 역시 살아 내기 위한 민초들의 버르적거림이다.
어느 결에 봄이 다가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