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네 집에 놀러왔다 하룻밤을 자고서도 암사돈은 돌아갈 기미가 없다. 사돈 관계는 어색하고 불편하기 마련이다. 좀 갔으면 좋겠는데 내색은 못하고 수사돈은 상대가 토심 안 느끼게 정성스레 배려해줬다.
마루에 앉아서 이런저런 한담을 나누는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때다 싶어 수사돈, 아유, 비가 오시네 하고. 암사돈도 쳐다보며, 그러게요 하며 둘 다 환하게 웃는다.
속내는 이렇다.
암사돈 : 사돈 얼른 가시라고 비가 오시네.
수사돈 : 그러게요, 나더러 더 있으라 그러는지.
염재만의 소설 <반노>는 작품성과 관계없이 큰 화제였다. 음란물의 여부로 오랜 법정 싸움을 벌였다. 음란물이 아니라는 최종 판결로 종결됐다. 소설을 읽어 보지 않아서 소설에 대해선 쓸 말이 없다. 그 당시 이 소설을 읽으려고 했던 적이 있다. 갓 스무 살쯤 되었을 때다. 성에 대한 욕망이 가장 왕성할 때였으니 이런저런 도색잡지나 어쩌다 얻어들은 포르노테이프 정보 따위에 혹하던 시기였다. 당연 <반노>의 소문은 그것을 찾게 했고 서점에 없는 것을 헌책방에서 찾아냈다.
그것을 온전히 읽겠는가. 앞으로가기하여 중요한 장면들만 골라보는 에로비디오처럼 반노 책도 그렇게 훌 넘기며 중요한 장면만 눈이 벌겋게 서치하였는데 먹을 거 없는 소문난 잔치처럼 참 실망했다. 잔뜩 높아진(?) 내 눈을 철저히 유린하였다. 무시로 감흥에 빠지게 했던 <만딩고>의 거시기한 장면들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런 걸로 음란물 취급을 하다니!
애초의 기대를 포기하고 그럼 문학작품으로 순수하게 정독해 볼까 하고 첫 장부터 읽어 나갔는데 원 무슨 말인지 하나도 재미가 없고 따분하여 진도가 나가질 않았다. 그래서 처박아놓고 다신 손을 대지 않았다.
1982년 이영실 감독이 이 소설을 영화로 만들었다. 정윤희 유지인 장미희 트로이카에 이어 80년대에는 원미경 이미숙 이보희를 일컬어 에로이카라 하였다. 반노는 그 원미경 주연이다. 얼마 전 유튜브에서 우연히 발견하였다. 한번 볼까? 아직도 철이 없는 탓일 게다. 역시 화면 서치로 죽죽 중요한 부분만 골라보는 이 유치함. 소설 읽었을 때의 복사판처럼 역시 밋밋하고 재미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80년대 초 그 당시라면 제법 볼만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때 감동적으로 봤던 <애마부인2>가 지금 보면 젖꼭지도 한번 안 나오고 아주 유치하기 짝이 없으니 말이다. 지금은 웬만하면 음모 노출하는 건 기본이고 성기까지도 보여주는 시대다.
공원 장면이 나온다. 마흥식과 원미경이 벤치에 앉아 저쪽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다. 젊은 부부가 아이와 놀고 있다. 행복해하는 그들을 바라보며 마흥식과 원미경의 얼굴에도 행복과 부러움의 웃음이 가득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시선은 다르다. 마흥식은 예쁜 아기에 대한 부러움이고, 원미경은 그 여자의 손가락에 낀 반지가 부럽다.
하나의 사물이나 상황을 놓고도 저마다의 시선과 개념은 다 다른 것이다. 그것은 물론 자기 위주다. 내가 믿고 싶은 것은 진실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믿지 싶지 않고 심지어는 부정하려 한다. 대통령탄핵과 더불어 진행되고 있는 현 정치상황을 겪으면서 절감한다. 인터넷 기사를 보아도 자신이 믿고 싶어 하는 기사만 골라 읽는다는 것. 그럼으로써 더욱더 자신의 생각이 진리라는 것이 공고해진다. 내 생각과 정반대의 것은 웃기시네 폄하하고 흘려버리고 만다.
박근혜가 구속되는 어제 경주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박사모 사람들은 하늘이 노해서 벌을 내렸다고 한다. 비도 내렸다. 하늘이 슬퍼한다고 한다. 오늘은 날씨가 화창하다. 그들은 ‘태극기집회’하는 날이라서 하늘이 도움을 주신다고 한다. 억지해석이라도 해서 분한 마음을 위로 받고 싶은 것이다.
박사모를 폄하하고 비하하는 입장에서 볼 때는 어처구니없는 망상으로 보여 웃지만 실상은 우리 모두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은가. 뭐든지 아전인수 내 유리한 쪽으로만 물길을 돌려놓고 싶은 것이 우리 인간들의 속성이다.
구치소로 갈 때 일단의 사람들이 보라색 장미를 들고 배웅했다고 박사모 사람들은 그것을 감동의 장면이라고 추켜세운다. 보라색 장미는 고난과 시련을 의미한다. 박근혜의 구속을 축복한다는 의미의 행위임을 나중에 안다면 속상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곡해해서 눈물 나는 감동을 느꼈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그게 무슨 상관이냐. 그만큼 내가 박근혜를 사랑한다는 게 중요하지.
핑크 마티니 : Let's Never Stop Falling In Love
'서늘한 숲 > 햇빛 속으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연암도서관의 봄 (0) | 2017.04.05 |
---|---|
사천 선진리성의 벚꽃 (0) | 2017.04.03 |
30년 입은 옷을 버렸다 (0) | 2017.03.24 |
밤 벚꽃놀이 (0) | 2017.03.23 |
여사친과 1박 2일 여행을 갈 수 있나요 (1) | 2017.03.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