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가을이었다. 무작하게 사람을 병에 들게 하고 이유 없이 문밖을 나가 갈데도 없으면서 후미진 골목길을 배회하게 만드는 게 가을이다. 그 후미진 골목 담장 아래로 누렇게 퇴색한 벚나무 잎들이 바람에 구를 때 그들은 또 뜬금없이 사람을 그리워하며 한숨짓는 것이다. 가을은 우리에게 악질 염병이다.
그 가을에 내 직장동료인 K가 몹쓸 그 염병에 걸려 죽을 지경이었지요. 애인이 도망을 가 버렸어요. K는 심성이 착한 것 빼고는 매력이 거의 없는 사내랍니다. 얼굴도 못 났고 키도 작고 집이 부자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직업이 좋은 것도 아니었어요. 우리가 일하는 사무실은 여름 한철 반짝하는 유원지를 관리하는 사무소였으니까 말이 좋아 사무실이지 놀다 가는 향락객들 뒤처리나 해주는 하급 노동자였어요. 그러니 나나 K나 직업이 좋다고 하지는 못 하지요. 단 하나 그가 부러웠던 건 하얀 승용차입니다. 뽑은 지 몇 달 안 되는 아반테가 가을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면 정말 근사했거든요. 집이 부자가 아니면서 어찌 무리를 해서 차를 뽑았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그에게 유일한 일상의 낙이란 아반테에 올라앉아 선글라스를 쓰고 뻐기며 출퇴근하는 것이었어요.
그런 그가 사무실 미스 M을 사모한 겁니다. 사실 까놓고 말하면 미스 M도 그리 매력적인 아가씨는 아니었답니다. 예쁘지도 않고 몸매가 좋은 것도 아닙니다. 뚱뚱한 건 아니어도 그저 보동된 몸집에 게다가 사내처럼 강동 쳐버린 머리는 정말이지 아니올시다였지요. 그렇다면 심성이라도 고우면 좋으련만 맘씨는 어찌 그리 고약하고 우악스러운지 말투는 또 어찌 그리 되통스러운지 목소리까지도 저음목청에 나 같으면 시쳇말로 트럭으로 실어다 줘도 안 가질 만한 여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랑의 감정이란 게 묘한 것이어서 그 가을에 둘이 그만 그렇게 된 겁니다. 나랑 절친이어서 가장 먼저 내게 털어 놓습디다. 이미 많이 가까워졌다고. 아 뭐 두 사람이 그 전부터 친밀한 거야 모르진 않았지요. 퇴근할 때면 예의 하얀 아반테에 둘이서 같이 퇴근하곤 했더랬어요. 미스 M은 늘 아반테를 선망하면서 차가 멋지다고 입에 발린 소리를 했고 K는 농담처럼 실컷 태워준다고 신소리를 해대곤 했지요. 두 사람의 집이 방향이 정 반대라서 그녀 집에 데려다 주고 가려면 아마 시간상 꽤 걸렸을 텐데 그거야 내가 상관할 것은 아니라도 속으로는 K를 은근히 흉도 보곤 했지요.
그랬는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니 조금은 놀랐어요. 그의 고백에 의하면 일요일마다 만나 데이트를 했고 미스 M의 부모님도 만나 보았다고 합디다. 그 정도면 이미 가을이 끝나기 전에 국수 먹게 무르익은 게 아니겠습니까. 그 사실은 한 사람 한사람 전해지며 둘의 결혼이 기정사실화 되어 우리 모두들 진심으로 축하한다는 태를 보여 주었지요. 솔직히 말하면 그래도 나와 우리는 속으로 별로 어울리지 않는 커플이라고 외면했어요. 내 착한 동료 K에게 그 아가씨는 정말 매력이 너무 없었거든요. 무얼 보고 반했는지 미스터리였어요. 내 짧은 판단으론 아마 K는 여적 연애를 못 해봤을 거란 짐작이었어요. 여자가 궁하면 웬만한 여자는 다 예쁘게 보일 테니까요. 군부대에선 지나가는 할머니만 봐도 환장한다고 하잖아요. 그런 사내에게 여자가 매일 아반테 태워 달라고 하니 이게 웬떡이냐 무작정 넘어갔을 거란 게 내 추측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미스 M이 사라져 버렸어요. 아침에 출근을 안 한 것까지야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K가 몹시 불안해하는 겁니다. 계속 그녀에게 전화를 하는데도 통화가 되지 않으니 하루 종일 얼굴이 말이 아니게 굳어 울가망하는 게 역력하더이다. 우리 중의 누구도 미스 M의 일신상을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녀의 애인은 물론이고 절친인 사무실 선배 언니도 몰랐고 소장도 전화 연락 받은 게 없었어요. 완벽한 무단결근이고 완벽한 잠적이었지요.
며칠이 지나도록 그녀의 행방은 묘연했고 K는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했어요. 그리고 또 며칠이 지났어요. 사무실 선배 언니가 미스 M의 어머니와 어렵게 통화했다면서 좋지 않은 말을 전했어요. 우리 애 이제 사무실에 안 나갈 거니까 퇴사처리해 달라더라고. 그리고 K가 없는 시간을 기다려 나지막이 전해준 말에 우리는 모두 충격에 빠졌지요. 미스 M이 곧 결혼할 거라고. 그냥 조용히 집안 식구끼리만 할 거며 결혼해서는 멀리 보낼 거라면서 사무실 사람들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말라 그러는 걸 얘기하는 거라고.
도무지 맹문을 알 수가 없었어요.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아무리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소설을 써 봐도 도저히 그 상황을 유추하지 못하겠습디다. 남자가 돈이 있어 알겨먹을 조건도 아니니 그 여자의 정신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결론 밖에 못 얻었어요. 그리고 우리들은 어느 결에 강한 동지애가 생겨 미스 M 흉보고 뒷담화 까는 데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나날을 보냈어요. 그 나날은 우리 착한 K에게는 일생 가장 고통스럽고 뼈저린 시간이었고요.
그런데 나중에 상기해 보니 의외로 간단한 결론을 얻었어요. 미스 M은 K를 좋아하지 않았으리라는. 연애경험이 없고 그래서 여자가 궁박한 K의 서툰 감정이 부른 비극이라는 것을. 설마설마 했는데 심각하게 다가오는 K가 점점 두려워졌을 테지요. 물론 내 추측일뿐 거기에 대해선 여적 들은 바가 하나도 없지만요.
사랑이란 정말 아무 예고도 없이 왔다가 아무 예고 없이 사라져 버리는 소나기 같은 것인가 봅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다가온 여인에게 준 그의 마음은 너무나 허무한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만나면서 아반테를 타고 여러 번 여행을 다녀왔다고 하니 마음뿐 아니라 몸까지 다 바쳤던 모양입니다.
사무실 앞 벚나무의 붉게 물들어 가는 잎들만 하염없이 바라보던 K는 그 잎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할 무렵에 사무실을 그만두었습니다.
애써 웃어 보이며 인사를 남기고는 그가 사랑했고 내가 사랑했던, 아니 미스 M이 사랑했던 하얀 아반테를 타고 영원히 가 버렸습니다. 차에 반사하여 번쩍 빛나는 늦가을 햇살이 어찌 그렇게도 슬프던지요.
가을은 정말 몹쓸 염병이야요.
그리고 여러 해가 지났을 때 나는 충주에 살고 있었다. 어떤 계기로 말미암아 아주 외진 숲속에 살기를 갈망했고 그 열병 같은 운명을 따라 그곳을 떠나기로 작정하고 아파트를 내놨다. 운이 좋아 처음 전화를 한 사람과 말이 잘 되어 매매를 하기로 결정하고 그 다음날 그 사람이 집을 보러 왔다. 젊은 부부였는데 나는 혼절할 뻔 했다. 그해 가을에 그토록 진저리치게 지독한 염병을 주고 잠적했던 미스 M이 그 아내 되는 사람이었다. 내가 그럴진대 그녀는 오죽할까.
어차피 도시를 떠나 숲에서 묻힐 처지이기에 아파트만 넘기면 세상과는 끝나 버릴 인연이었다. 굳이 지나간 것을 들그서내어 다시 염병에 걸릴 필요는 없었다. 지나간 것은 그것대로 또 현재의 것 역시 그것대로 세상에 녹아들어 사는 게지.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인지 그때의 것들이 뭐 그리 궁금하지도 않았다. 이미 나는 K의 존재조차도 다 잊고 있었으니까.
다만 지금까지도 가슴에서 지워지지 않는 건 가을 햇살에 반짝이던 그 하얀 아반테의 마지막 뒷모습이다.
'서늘한 숲 > 햇빛 속으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들이 나를 불러 (0) | 2012.04.18 |
---|---|
떠오르지 않는 말들 (0) | 2012.04.10 |
시간을 거꾸로 돌릴 수 있을까 (0) | 2012.04.07 |
묵언 (0) | 2012.04.01 |
표정 (0) | 2012.03.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