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햇빛 속으로

남도의 겨울 이야기

설리숲 2011. 12. 10. 22:54

 

 

 

 

 펄펄 눈이 내리는 날 사료가게 들창문 뒤로는 갈대가 일렁였다. 남도의 겨울은 엔간해선 춥지 않지만 이런 날은 대신 외롭다. 을씨년스럽고 팍팍하다.

 하루 쉬고 싶은 뜨내기 막일꾼은 눈이 온다고 아침부터 비비적대며 결국은 일을 나가지 않았다. 하긴 눈이 많이 오면 나갔던 사람들도 도중에 작파하고 들어오기 쉽다.

 장터 골목의 허름한 사글세방.

 이곳은 70년대 별들의 고향에서 딱 시간이 멈췄다. 닷새마다 서는 장날에만 사람이 좀 벅적대고 무싯날은 적막하기 그지없다. 기실 장날이라도 벅적대는 것도 아니다. 장꾼 열 남짓 들어와 좌판을 펼쳐 놓고 그보다 두어 곱 정도 되는 구경꾼 서성거리다 가면 장은 정오가 되기도 전에 파한다. 그 장꾼이라야 인근의 노인네들 시간 혹은 손주들 군것질거리나 벌어 보려 나와 앉는 패들이요, 사지도 않으면서 값이나 물어보는 구경꾼들도 역시 그와 같은 부류의 노친네들이 거개다.

 

 

 이런 무싯날은 참말 무료하기 짝이 없다. 하루 종일 누워 TV 리모콘만 눌러댔다. 별들의 고향과 조금 다른 풍경이라면 이 리모콘이다. 서골이라도 TV채널은 제법 여러 개가 나와 그나마 심심을 달래 준다.

 얇은 벽 밖에서는 처마 아래 낡은 보일러가 지둥치듯 요란스럽게 돌아간다. 방바닥은 절절 끓는데 외풍은 세서 뜨내기 막일꾼은 점퍼를 입고도 이불을 뒤어썼다. 대체 사는 게 머시간디 이 머나먼 전라도 땅 후미진 골방에 두더지마냥 웅크리고 앉아 있느냐. 다들 이와 같다. 이씨 아저씨도 병균이도 종하도 아직 서른을 안 넘긴 앳된 진영이도 볕들지 않는 그 옹색한 살이가 내내 그를 외롭게 했다. 이렇게 날이 궂은 날에도 한 푼 벌어야겠기에 새벽밥 한 술씩 뜨고 어느 황토밭 흙구덩이에 발을 박고 있으리라.

 때는 문명이 눈부시고 세상은 스마트폰이 어떻네 카카오톡이 어떻네 정신이 혼미하게 달려가지만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는 뜨내기들은 일절 바람 막아 주지 못하는 황량한 들판에서 식어 버린 찬밥을 오도독 씹으며 희망 없는 하루하루로 기나긴 겨울을 죽였다.

 

 

 달력의 금발 여인이 웃는다. 이 엄동설한에 처녀는 홀라당 벗고 싱싱하게 웃는다. 몸도 싱싱하고 웃음도 싱싱하다.

 달력은 이미 이태가 지난 달력이다. 그간 이 방에 들었던 사람도 여럿 됐을 터인데 달력은 이태 전의 사간에서 멈춰 있다. 달력 따위엔 관심을 둘 여력이 없는, 다 같은 뜨내기 막일꾼들이었으리라. 그나마 저 한 장 짜리 달력이 걸려 있는 건 저 금발의 처녀가 아름다워서이리라. 동네도 집도 방도 음식도 옷도 후줄그레하고 삶도 주머니도 허줄한, 모든 것이 어둡고 칙칙한 것 일색인 이곳에서 저 벌거숭이 아가씨만이 아름차다. 어느 한 부위를 뚫어져라 보고 있자면 고단한 몸뚱아리도 누그러지며 제법 호색한답게 음충맞은 활기도 돋곤 하는 것이다. 그래 봤자다. 거기서 눈을 떼면 세상은 음울하고 어둑하다. 이놈의 방은 채광도 안 돼 하루 종일 어둑신하기만 하지.

 저녁 어둠이 깔릴 때 진종일 겨울바람을 맞은 뜨내기 막일꾼들은 신발에 잔뜩 흙을 묻힌 채 따스한 사람의 정이라곤 없는 별들의 고향 사글세방으로 기어들었다. 눈은 그쳤고 사료가게 들창문 너머 공터에는 갈대가 스산스레 요둉쳤다.

 

 남도의 겨울은 엔간해선 춥지 않거늘 이놈의 겨울은 무작스레 춥고 육실허게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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