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늦긴 해도 봄은 봄이다. 오랜만에 숲을 거닌다. 겨우내 모진 눈보라를 견딘 어린나무의 가녀린 눈에도 파랗게 물이 오르고 있다. 시간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분명 봄이 오는 걸 몸으로 느끼지만 그 어느 곳에서 시작되어 오는지는 알 수 없다. 또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겠다. 시간의 목적지는 어디인가.
지난겨울은 유난히도 거칠고 매서웠다. 숲속 여기저기 부러진 나뭇가지들이 엉기정기 널브러져 있다. 이 무성한 숲속까지 짓쳐들어와서 무수한 상처를 남긴 바람의 위력이 엄청남을 알겠다. 그럼에도, 그 세찬 폭풍들이 휩쓸어도 숲은 여전히 안녕하다. 고요하고 아늑하다. 자연은 대범하고 관대하다. 그러므로 숲은 거룩하고 하늘과 땅, 바람과 햇볕은 위대하다. 아름답다.
전나무 애순에 매미의 탈피가 걸려 있다. 언제 빠져 나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위대하고 거룩한 대자연의 한 부분으로 삶을 살아간 그 어느 생명 하나를 경이롭게 추모한다. 그들에게 삶은 오로지 삶이다.
불가의 스님들은 발걸음에도 삼가 배려를 잊지 않는다. 사뿐사뿐 사르디뎌야 한다. 그 발밑에 깔리는 미물들이 고통스러워하지 말기를. 내가 딛는 한걸음 발자국 밑에만도 수십만의 생명이 존재한다. 하물며 이 거대한 우주에는 그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있을까. 돌아보면 인간이 얼마나 사악하고 파렴치한 족속인가.
동물들은, 아니 모든 생물, 아니 모든 생명들은 참으로 자유롭다. 머리로는 근본을 모르더라도 몸으로 감각적으로 세상의 그 모든 것을 알고 스스로 적응해 살아간다. 그들은 그들의 삶을 사랑하고 자연을 존경하고 스스로 자연의 터전이 되어 뒤이어 찾아오는 세대들에게 기꺼이 바친다. 그들은 얼마나 근사한 족속인가.
그들은 결코 욕심으로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그들이 남을 공격하는 건 죽지 않기 위해서다. 최소한 배를 채워야 삶을 지탱한다. 그들은 살기 위해서 남을 공격한다. 그리고 절대 필요 이상의 욕심은 부리지 않는다. 배를 채우면 더 이상은 해치지 않는다. 인간들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스스로 자화자찬하는 그 족속들은 아! 너무나도 탐욕적이다. 제 배를 채우고서도 만족하지 못해 더 많은 것을 탐학하기 위해 끊임없이 혈안을 뒤룩거린다. 인간이 가장 진화한 생물이라는 건 도대체 어느 대갈통에서 나온 말인가.
매미가 아주 짧은 생애를 살기 위해 기나긴 인고의 시간을 땅속에서 기다리는 이유를 인간은 알까. 분명 그만한 연유가 있고 그것은 필시 자연의 시스템에 얽매여 돌아가기 위한 생태일 것이다. 그것은 위대한 삶이며 아름다운 생태다. 인간이 매미의 삶을 안다고 할 수 있나. 인간은 모든 것을 자신의 잣대로만 생각하고 판단하는 어리석은 족속이다.
인간은 그들에게 없는 욕심도 참 많다. 그 한 가지가 성욕이다. 그들은 생식을 위한 성을 한다. 성을 즐기는 족속들이 이 세상에 또 있을까. 인간만이 쾌락을 위한 성을 한다. 그것이 가장 진화한 동물의 증거라고 우기는 것이다. 너무 뻔뻔하고 낯간지럽지 않은가.
넘어진 소나무 등걸에 걸터앉아 오카리나를 분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올 때 누군가로부터 무슨 지령이라도 받은 걸까. 너희들은 그곳에 가면 일을 해야만 한다. 편하게 쉬거나 놀지 말고 시간을 일로 보내거라.
일을 하지 않고 딩가딩가 늘 즐겁게 놀며 시간을 보낼 수만 있다면 얼마나 근사한 삶인가. 단언하건대 어느 누구도 일을 하란 명령을 받지는 않았다. 그럴 수만 있다면. 일을 안 하고 살 수만 있다면.
그러나 신은 인간에게 - 아니 모든 생물에게 - 약점을, 그것도 아주 치명적인 약점을 주었다. 먹지 않고는 살 수 없게 했으며 분하고 억울하게도 모든 먹을거리가 저절로 입에 들어오게 해 주지도 않았다. 우리는 늘 배를 채우기 위해 움직이고 끊임없이 그것을 찾아 다녀야 한다. 그래야 한다.
그럼 먹을 것을 찾아 배를 채웠으면 그만이다. 그것을 먹기 위해 우리는 그만한 노동을 해서 그만큼의 삶을 영위한다. 더 필요한가.
그 분으로부터 일만 하라는 강압적인 명령을 받았단 말인가. 우리는 우리가 하등동물 또는 미물이라고 하찮게 여기는 그들로부터 배워야 한다. 그들은 평생 놀기만 한다. 일은 배가 고플 때만 한다. 아주 필요한 만큼만.
부족함 없이 필요한 모든 것을 다 가졌으면서도 우리는 습관처럼 고되고 힘든 일을 오늘도 하고 있다. 숙명이라고 자기합리화까지 하면서. 스스로 시지프스가 되고 싶었을까.
나는 고독하고 싶다. 여러 갈래로 분류된 족속, 그 중에 인간이라는 아주 이색적인 족속에 포함된 나는 그 집단으로부터 외로이 떨어져 있고 싶다. 나는 한 마리의 짐승이고 싶다.
오카리나는 고독하다. 오로지 혼자서만 존재한다. 모든 악기들은 다른 동료와 어울려 합주를 하지만 오카리나는 동료들과 어울리지 못한다. 두 개 이상의 오카리나를 연주하면 융합되지 못하고 음이 부딪친다. 많은 오카리나 애호가들이 제딴엔 연주랍시고 여럿이 어울려 합주를 하지만 그 음악은 세상에서 가장 듣기 거북한 소리가 되고 만다. 그들 스스로 잘 알지만 애써 무시한다. 오카리나는 오로지 혼자여야 그 존재가 가치를 발한다. 나는 짐승의 외로움과 오카리나의 고독이 되고 싶다.
소로우는 저 유명한 <월든>에서 삼나무의 고고함과 고독을 찬양했다.
「나는 페르시아의 시인 사디가 쓴 <굴리스탄>, 즉 <화원>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대목을 읽었다.
사람들이 현자에게 묻기를,
“지고한 신이 드높고 울창하게 창조한 온갖 이름난 나무들 가운데, 열매도 맺지 않는 삼나무를 빼놓고는 그 어느 나무도 '자유의 나무'라고 불리지 않으니 그게 어찌된 영문이나이까?”
현자가 대답하기를,
“나무란 저 나름의 과일과 저마다의 철을 가지고 있어 제철에는 싱싱하고 꽃을 피우나 철이 지나면 마르고 시드는도다. 삼나무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항상 싱싱하느니라. 자유로운 자들, 즉 종교적으로 독립된 자들은 바로 이런 천성을 가지고 있느니라. 그러니 그대들도 덧없는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 칼리프들이 망한 다음에도 티그리스 강은 바그다드를 뚫고 길이 흐르리라. 그대가 가진 것이 많거든 대추야자나무처럼 아낌없이 주라. 그러나 가진 것이 없거든 삼나무처럼 자유인이 될지어다."」
나는 한 마리의 외로운 짐승과 고독한 오카리나와 고고한 삼나무가 되어야 한다. 글과 지식을 알아 저 소로우의 책을 읽고 그 구절을 인용하는 행태부터가 나는 어차피 인간족속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걸 안다. 그것이 나의 딜레마이기도 하고 약점이기도 하고 아무튼 좋은 감정은 아니다. 그러나 어쩔 텐가. 그것이 나의 한계이고 세상의 그 누구도 전지전능한 힘을 가진 자 없으니 담담히 내가 지고 있어야할 운명이기도 하다. 그걸 떨쳐 버릴 수만 있다면 그는 비로소 신의 경지에 다다른 초인이 되겠지만 나 같은 미개한 짐승 따위는 그저 위대하고 아름다운 자연 안에서 나름의 생태로 살면 족하지 않은가.
시간은 엄청난 속도로 흘러가고 이 서늘하고 그늘진 숲에도 뜨거운 열기는 찾아들 것이다. 자연과 숲은 늘 그대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끊임없이 돌고 돌아 종국엔 알 수 없는 어느 미지의 그곳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그게 어딘지 누가 알겠나. 신이라도 있다면 그 신조차 알 수 있겠는가. 세상과 우주만물은 모두 불확실하다.
나는 그저 껍질만 남기고 어디로 갔는지 종적을 모르는 매미처럼 나의 생태로 그렇게 살고 싶은 것이다.
그러다 보면 여름은 가고 또 가을 겨울이 올 터인즉. 2010. 4. 10
'서늘한 숲 > 숲에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숲속의 왕자.. 거미 (0) | 2010.06.03 |
---|---|
가지나방 애벌레 (0) | 2010.06.01 |
아까시나무.. 이름을 바로잡자 (0) | 2010.05.05 |
나의 숲 (0) | 2010.04.09 |
담양 죽녹원 (0) | 2010.0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