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투어 서울] 쌍문동
전에 낡은 컴퓨터를 쓸 적에 오랫동안 집을 비우게 되면 전원코드를 뽑아 놓곤 했다.
그런데 다녀와서 컴퓨터를 다시 켜면 매번 컴퓨터의 시간이 1988년으로 돌아가 있곤 했다. 현재시간으로 수정을 해 주어야 정상으로 시스템이 가동되었다.
왜 1988년으로 돌아가 있는 것이며 그런 오류를 일으키는 건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다. 1988년에 우리에게 무슨 일들이 있었나.
추억을 회상하면 좋은 추억이건 흑역사든 현재의 우울함을 잠시나마 잊게 되는 치유의 효과가 있다.
흘러간 노래, 그때는 내가 어떤 옷을 입었지. 부모님은 아직 돌아가시기 전이라 그 품안에 안겨 많이 든든했었지.
화려한 올림픽의 뒤안길에는 유전무죄무전유죄의 지강헌이 홀리데이를 들으며 세상을 하직하고 있었다.
미모의 브룩 쉴즈는 지금은 어떻게 늙어 있을까.
내가 잠시 마음을 주고받았던 그녀는...
그래, 사랑 연애... 가슴 부풀고 싱그럽던 우리들의 청춘이야기. 숱한 사연과 절절한 에피소드들.
그럴 즈음에 이런 우리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드라마가 있었다.
<응답하라1988년>
지상파 방송국들은 천박한 막장드라마로 사람들을 황폐화시키는 경쟁을 하는 와중인데 오히려 케이블에서 잔잔한 고급 드라마를 방영한다. 그 반대여야 할 것을.
그 이후로 한동안 쌍문동이 사람들의 관심을 많이 받았다. 드라마의 영향 탓이다.
아직도 쌍팔년 이전의 풍경이 군데군데 남아 있는 동네다. 골목이 있고, 슈퍼 앞 평상엔 이웃집 할배 두엇이 막걸리를 권하고 앉아 어스름 저녁 퇴근해 돌아오는 정 씨네 딸내미에게 인사를 받는 곳.
드라마는 사람들의 정이 흐르고 고단한 삶들을 서로 보듬어 주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담았다.
"1983년4월22일생,
본적은 서울시 도봉구 쌍문동,
현주소는 부천시 원미구"
쌍문동 또 하나의 전설 아기공룡 둘리의 프로필이다.
먼 빙하기에서 온 괴물. 이 넓고 넓은 누리에서 그는 한국, 그것도 쌍문동을 선택했다.
<응답하라 1988>도 마찬가지겠지만 둘리 작가 김수정도 그 당시의 쌍문동이 평균적인 서울을 상징하는 지역으로 보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부자는 아니지만 좀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오늘을 사는 소시민적 서울사람들의 애환이 서린 곳이다.
숭미초교 옆 블록에 둘리뮤지엄이 있다. 쌍문동은 둘리의 테마 동리이기도 하다.
아이들 손잡고 들어가지 않는 한 어른들에겐 별로 재미가 없는 곳이다.
아침부터 하늘이 무겁게 내려앉아 있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기분 탓인가, 우중충하던 사물들이 산뜻해졌다. 피부에 닿은 비는 선득했다.
겨울이 끝나 가고 있다.
해는 점점 길어질 테고 계절은 또 여름으로 가고 있다. 그러나 도시는 여전히 황량하고 공기는 싸늘하다.
그래도 골목 구석구석 느껴지는 이 계절감. 우리 사는 세상은 늘 이렇게 부산하게 움직이며 떠들썩하다. 세상이 궁금하면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지 깊은 바위 밑에 앉아 있어야 뭘 할 수 있을까.
아! 그리고 또 하나.
소녀대.
쌍팔년도 당시 국내 대중문화계를 굵고 강렬하게 휘저은 세 여인.
두 개의 충격이었다.
하나는, 일본인의 노래는 한국에서 소비할 수 없는 법률을 극복하고 최초로 우리나라에서 공연을 한 일본 가수들이라는 것과,
또 하나는, 너무 예쁜 미모의 소녀들이라는 것.
그들은 한국인이 처음 본 걸그룹이었다.
그때까지 한국의 여성그룹이라면 서울시스터즈 숙자매 바니걸스 희자매 등 연륜이 있는 성인 그룹이었는데 소녀대 어린 세 아가씨들의 비주얼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들이 휩쓸고 간 후유증으로 세또래를 필두로 한국에도 걸그룹이 태동하기 시작했다.
우리 흔히 구닥다리를 비하할 때 ‘쌍팔년도 마인드’라고 한다.
그렇지만 쌍팔년도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 시대를 지나온 우리들에게는 아련하고 소중한 시대였다는 것.
잠실 스타디움의 환희와 함께 ‘손에 손잡고’ 세계를 향해 나가는 한 전환점이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이제 나는 쌍문동의 옛 추억 같은 골목들을 돌아 나왔다.
세상의 길은 다 거기서 거기다. 추억 하나 길어 올리는 우물 같은 것이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 증에서 : 이젠 잊기로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