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입은 옷을 버렸다
꼭 30년이다.
30년 입은 녹색 재킷을 버렸다. 청장년을 같이 했으니 반평생이라기보다 한평생을 입었다고 해야겠다. 그리 오래 입었는데도 어디 한군데 해진 데가 없다. 그냥 약간 작아져서 입기 싫었을 뿐이다. 그마이 오래 입어 정이 들었을 테니 버릴 때 서운하겠다는 생각도 미리 했었는데 손톱만큼도 서운함은 없었다. 대신 알지 못할 서글픈 감정이 있었다.
정장을 입을 일이 별로 없으니 나는 언제나 캐주얼이다. 고상하게 캐주얼이지 그저 티셔츠에 청바지 따위가 내 옷차림이다. 20대나 30대나, 50이 넘은 지금도 역시 그러하다. 젊었을 때 산 옷이 해지지 않으니 그냥 입는다. 적어도 옷차림만으로는 내게서 나이를 가늠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도 내가 보유한 옷들은 30대에 샀던 그것들이다. 가끔 새로 사는 옷도 다 그런 것들이다.
서운함은 없어도 그 녹색 재킷을 사던 때의 상념은 생생하다. 이맘때 봄이었던가. 아니면 가을쯤이었는가 분명하지는 않다. 인천 공장에 다니고 있었다. 내 나름의 격정기였고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정치는 군부독재 물러가라고 온 나라가 아우성이었고, 노동자들은 궐기하여 일어나라며 모든 작업장마다 분규에 파업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었다. 나는 자랑스런 노동자였다.
그제껏 심각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던 삶의 의미를 그즈음 많이 고민하고 번뇌하였었다.
노사분규와 파업의 와중에도 우리는 시간 맞춰 일하고 시간 맞춰 퇴근했다. 일요일엔 달콤한 여가도 즐겼다.
같은 부서 동료들과 어느 일요일 강화도 마니산엘 다녀왔다. 하산 후 인천으로 돌아오는 버스 정류장에서 나는 홀로 남았다. 이유 없이 일행과 떨어져 혼자이고 싶었다. 초행의 길도 모르면서 그 일대를 돌아다녔다. 거기가 어딘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해가 기울며 땅거미가 내려올 때쯤 행인에게 물어 인천으로 돌아오는 정류장을 찾았다. 그때 먼발치에 있던 옷가게에서 눈에 띄던 녹색 재킷을 샀다. 그냥 샀다. 그것뿐이었다.
버스를 기다리며 왜 슬픔이 몰려왔는지 모르겠다. 낯선 곳에서의 고독감이었을 수도 있고, 서쪽의 하늘에 뉘엿거리는 석양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노을이 눈물 나도록 아름다웠는지도 기억에 없다. 그러니 그것도 아니라면, 그래서 내가 격정기라거나 질풍노도의 시기였다고 짐작하는 것이다. 이유도 없이 어떤 감정이 생기는 못된 시절.
어저께 우연히 듣게 된 해바라기의 <너>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그날 버스 정류장에서 옆진 얼굴에 석양을 받으면서 낯선 고독감을 즐기고 있을 때, 옷가게에서 흘러나오던 노래가 해바라기였다. 딱히 그 노래가 격한 슬픔을 줄만한 노래도 아니지만 우리는 살면서 이유도 없이 그런 경험을 하곤 한다. 우리 인간은 그런 점에서 나약하기도 하지만 아름답고 행복한 존재임을 절감한다. 그날 <너>를 들으며 내가 그랬으니까.
당시 <사랑이 꽃피는 나무>라는 인기드라마에서 대학생 최재성이 교수인 양미경을 좋아하고 있었다. 젊은이의 풋풋한 사랑은 현실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사랑이었다. 그 애절하지만 아픈 남자의 심정이 내게도 전해졌고, 정인을 바라보는 최재성의 얼굴이 클로즈업될 때 그 눈동자가 얼마나 절절했던지. 그때마다 배경음악으로 흐르던 노래가 해바라기 노래 <너>였다.
녹색 재킷을 버릴 때 일말의 서운함이 아닌 서글픔이 일어났던 건 강화도에서의 그 저녁 그 순간의 감정이 고스란히 되살아나서였을 것이다.
나는 앞으로도 버릴 옷이 많다. 옷뿐인가. 양말, 손수건... 두루마리 휴지 심, 빈 치약 튜브, 마시고 난 차 찌꺼기. 하다못해 내 손톱은 얼마나 많은 횟수를 깎아 버릴까. 머리카락은. 내 옆에 있는 것들은 종내 모두 다 버릴 것들이다. 청춘도 그러하겠지.
그날 강화도에서 그시절 누구나 다 했듯이 카세트 틀어놓고 고고 흔들어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