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
창밖의 바람은 알싸한가 보다. 입김을 내뿜으며 사람들이 지나가고 으춰.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들은 어깨를 달막인다. 안날 저녁 바람에 은행나무 잎이 다 지더니 그 아침 거리를 노랗게 채색하며 몰려다녔다.
소녀는 그 창가 테이블에 앉아 친구를 기다렸다. 낯설고 두려운 인천 어느 하늘 밑. 음악다방은 세련되지도 않고 그저 무료하고 착잡한 풍경이었다. 부지런히 사람들이 들어와 앉아서는 커피를 마시고 또 나갔다. 저 사람들은 왜 여길 드나드는 걸까. 할 일이 별로 없는 사람들인가. 내내 흘러나오는 통기타음악들이 하나도 재미가 없었다. 지루하고 사실은 두려웠다. DJ는 사뭇 소녀에게 관심을 주며 힐끗거리고 있었다.
인천에 일자리를 봐두고 면접을 보려고 안날 상경을 했다. 이미 먼저 서울로 와서 여고를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고 있는 친구에게 편지를 넣어 독산동 그녀의 집에서 그날 밤 신세를 졌다. 모처럼의 회포였지만 그보다는 집을 떠나 대도시에서의 생활이 우선 더 두려웠다. 그런 소녀에게 친구는 지푸라기였다.
자취방에서 밤을 보내고 친구에 이끌려 들어온 게 이 다방이었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미처 연탄을 준비하지 못한 친구 자취방은 써늘했다. 추위에 떨던 몸으로 다방에 들어설 때만 해도 안의 훈기가 얼마나 좋던지. 커피를 시켜놓고 홀홀 마시며 수다를 떨 때는 참말 설렜다. 두렵긴 해도 면접을 본 회사에 합격하여 모월 모일부터 출근하기로 하였다. 이제 구닥다리 촌구석이 아니라 세련된 도시 여자가 되는 거다. 갓 스물을 넘긴 소녀 앞에 놓인 것들은 얼마나 아름다운 미래인가.
친구는 떠나 버렸다. 잠깐 어디 좀 갔다 온다고 나가더니 오후 반나절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처음엔 배신감에 원망하였다. 남자가 있는 친구에게 소녀의 출현은 거북스러웠을 것이다. 문득 이해는 하지만 저 하나 믿고 온 고향친구를 이렇게 대접하다니. 그랬는데 시간이 점점 더 지나니 원망보다도 두려움이 컸다. 어떻게든 독산동 자취방을 찾아가야 하지만 거기가 어딘지도 모르니 막막했다.
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좋다지만 만나지 않으면 이 낯선 도시에서 미아가 될 판이었다. 인생을 새로 시작하는 소녀에게 기다림은 곧 두려움이었다.
DJ는 오래도록 창가에 앉아 기다리는 우수의 소녀를 위해 한껏 친절을 베풀었다. 지금은 아프지만 모든 이에게 희망은 있어서 더 좋은 직장을 가질 거라는 위로의 말로 노래 중간 중간에 멘트를 넣었다. 지역상 직업을 가지려는 사람들이 몰리는 곳이라 이 다방도 시시때때로 그들이 들고나는 찻집이이서 DJ의 눈에는 우울한 소녀가 직장을 얻지 못한 아이로 보였을 것이다.
소녀는 DJ가 보내는 쓸데없는 호의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게 창피했다. 아닌 게 아니라 저쪽 구석자리에 있던 일단의 청년들이 자꾸만 힐끔거리며 수군대는 것을 느꼈다. 얼른 나가고 싶었지만 독산동을 찾아갈 수가 없었다.
아가씨!
그리고 그중의 하나가 소녀에게 말을 걸어왔다.
아가씨... 이 낯선 단어. 소녀는 여태껏 자신을 어린아이로 알고 있었다. 청년이 불러 주는 아가씨라는 말은 얼마나 어색하고 생경한지. 그러나 어색한 와중에도 소녀는 갑자기 어른이 된 것 같은 대견함이 일었다.
허락도 받지 않고 청년은 소녀의 앞자리에 앉아서는 자신들을 인하대학생이라고 소개하면서 이런저런 질문들을 쏟아냈다. DJ가 그랬듯이 그들도 쓸데없는 위로를 해대며 환심을 사려 했는데 곧 소녀가 처한 사정을 알게 되었다.
기다림은 두렵기도 하지만 그 끝은 해피엔딩이 되기도 한다. 청년들은 진심으로 소녀를 위해서 독산동 자취방으로 가는 길을 가르쳐 주었고 직접 버스까지 태워 주었다. 그 중의 하나 하고는 다음에 만날 약속까지도 잡았다.
몰려다니던 은행잎들은 죄다 어디로 갔는가 거리는 황량하고 쓸쓸했다. 친구의 자취방이 있는 골목길을 들어서며 소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낙엽 져 버린 쓸쓸한 도시의 밤, 친구에 대한 서운함, 그에 반한 안도감이었다. 그리고 그날 하루에 그녀 자신이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느꼈다. 이제는 가녀린 소녀가 아니라 좀더 성숙한 어른이 되고 있다는 것. 세상은 고독하고 두려운 것만은 아니라는 것. 도시의 이 낯선 것들이 이제는 그녀와 함께 할 친구라는 것을 깨달았다. 무서워 할 것도 없고 외로워할 것도 없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곳에 지내왔던 것처럼 부쩍 성장해 있는 자신을 느꼈다.
영화를 좋아하지 않지만 화제가 되는 작품에 들어가 있는 음악들에 호기심이 생겨 인터넷으로 찾아보곤 한다. 어제는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를 보았다. 엔딩 음악으로 예전 뚜아에 무아가 불렀던 <임이 오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순식간에 시간을 뛰어넘어 추억 속으로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임이 오는 소리 같이 어디서 들리는 소리
내 가슴을 조이는 그 소리
그러나 오지 않네 이 밤이 지나도록
안타까운 내 마음은 그칠 줄 모르고
임이 오는 소리만 기다려져
기다리는 내 마음 기쁨이 넘쳐흘러라
그대 나를 찾아서 저기 오네
푸른 꿈 가득 안고 행복을 가득 안고
기다리는 내 마음에 꽃을 피우네
어서 와요 그대여 기다렸어요
행복한 꿈을 꿔요 옛날 같이
푸른 꿈 가득 안고 행복을 가득 안고
기다리는 내 마음에 꽃을 피우네
임이 오는 소리만 기다려져
임이 오는 소리만 기다려져
가인과 민서가 새로 리메이크한 노래인데 원곡의 복고적인 분위기가 그대로 살아 있어 좋다. 속삭이듯이 읊조리는 두 젊은 여가수의 창법이 매력적이다.
노래를 들으면서 간절한 기다림의 정경 하나가 떠올랐다.
며칠 전 만났던 이가 들려준,
오래 전 사회에 첫발을 내딛던 무렵의,
설레고 두렵던 날의 이야기가 생각나 내키는대로 윤색을 해 보았다.
만나기로 했던 청년과의 후일담도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