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전설, 철암
가을 아침이었다. 새벽의 기온은 아주 냉랭하다. 언덕에 바람이 불었다. 아 정말 가을이구나. 갑자기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다.
꼭 그래서만은 아니지만 아침에 눈을 뜨면서 문득 철암이 가고 싶어졌다. 한 번도 가보지는 못했다. 원래는 경포대를 가기로 지인과 약속이 돼 있었는데 철암 생각에 경포대는 가기 싫어졌다. 꼭 지켜야 할 약속도 아니고 지인도 그저 ‘낼 심심하면 넘어와 커피라도 한 잔 하시오’ 정도의 가벼운 인사말 이상은 아니었다. 갑자기 가기 싫어졌다고 전화를 넣어 ‘심심하면 철암으로 오시오. 커피라도 한 잔 하게’ 그렇게 약속을 깼다.
사북 고한 증산 황지 철암 도계 백산 통리.
첩첩산 강원도에서도 가장 유곡했던 이름들이다. 세월이 변하여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나 지금도 역시 그렇다. 힘겹게 넘던 기차도 온전하게 못 달리고 스위치백으로 잠시 숨을 고르는 곳이다.
어느 한때 아주 은성했던 시절이 있었다. 근대화의 물결을 타고 산업화로의 가속을 붙이면서 백두대간 이곳은 한국판 엘도라도가 되었다. 각지의 사내들이 모여들어 굴을 파고 돌아다녔다. 이른바 ‘검은 진주’들이 쏟아져 나왔고 진주들은 기차를 타고 전국 도시로 들어갔다. 사내들을 따라 여자들이 몰려들었고 이 땅이 생긴 이래 가장 번화한 고을을 만들어냈다. 인총도 없는 산간지대에 철도가 놓인 것은 검은진주 때문이었다.
70년대는 말 그대로 전설적인 시절이었다.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고 곳곳에 시가지가 생성되었다. 궁벽한 산촌이었던 황지읍이 삼척으로부터 독립하여 태백시로 승격되었고 도계 사북 고한 신동 등 우후죽순처럼 읍들이 생겨났다. 돈이 넘쳐 났다. 길거리의 개새끼도 지폐를 물고 다녔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다.
80년대로 넘어가고 산업구조가 변하면서 영원할 것 같았던 석탄의 명성은 그만 스러지고 말았다. 검은 사내들은 하나둘 자취를 감추고 지금 운영되고 있는 광업소는 몇 개 안 된다. 그들이 몰려들어 번성했던 자리는 다시 쓸쓸한 옛 한촌으로 돌아가 있다.
가을이다. 탄광지대의 풍경은 늘 삭막하다. 가을이 깊지 않건만 이곳에 서서 둘러보는 기분은 이미 을씨년스러워 가을 지나 겨울이 온 것 같다. 탄광산업은 사양되었어도 여전히 광부들은 채탄하고 운탄하고 선탄하고 있어 철암의 거리는 검은 먼지가 풀썩인다. 수시로 살수차가 다니며 길바닥에 물을 뿌리고 있다. 과연 빨래를 널어 말리지 못하겠다.
과거 번성했던 날에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해 천변에 까치발을 받친 상가와 주택들을 지었었다. 지금은 다 사라지고 지금도 건물철거작업이 진행중인 곳도 있다. 시에서는 일부를 남겨 놓아 박물관으로 전환하였다. 그 시절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전혀 포장하여 꾸미지 않고 옹긋 그 시절의 그 형태를 잘 보존하고 있다.
영화를 잃어버리면서 인구는 다시 줄어들었다. 시로 승격했던 태백은 다시 삼척으로 통합해야하지 않겠냐는 말도 자연스럽다. 신동읍은 웬만한 면소재지보다도 작아져 있다. 아직도 읍이라는 감투를 쓰곤 있지만 격에 맞지 않는 형편이다.
가을,
햇볕은 이곳에도 가득 쏟아지고 바람도 불고 지나간다. 그러나 이곳의 햇볕은 밝지 않고 바람은 신선하지 않다. 크고 밝은 빛이라 해서 태백(太白)이라 하였거늘.
불확실한 미래. 철암의 현재는 멈추어선 상태가 아니라 과거로 회귀하는 듯하다.
막장. 그리고 막장 인생. 최전방에서 채탄을 하는 곳. 더 이상 떨어질 수 없는 가장 처절한 인생을 우리는 막장인생이라 한다. 요즘 트랜드가 된 막장드라마의 어원이 바로 갱 속의 그 막장이다.
당신이여,
혹 철암이나 그 일대를 지나가게 되거나 아니면 호기심으로 여행을 하시려거든 흰 옷을 입고 오지 마세요.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면 시냇물을 검은 색으로 칠한다는 여기는 탄광지역입니다.
그래도 사람이 살지 못할 곳은 아니랍니다. 너나없이 삶을 영위하고 있고 부지런히 아이도 태어나고 있습니다. 담장 밑에는 꽃도 피어나고 가을철이면 지붕에 고추도 말립니다.
영화로운 전설을 간직한, 여기는 철암입니다.
닐 영 : After The Gold Rush
이 글에 정말 딱 맞는 노래를 선곡했다. 어찌 단박에 이 노래가 떠올랐을까.
이 곡 역시 팝의 전설 같은 노래다.